‘준비된 여성 대통령’의 ‘국민 대통합 시대’, 어쩌면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를 지금 슬로건으로 요약하면 이쯤 될 것이다. 그 시대엔 경제는 민주화되고, 검찰은 개혁되며, 복지는 전면적인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차별은 금지되고, 교육은 무상이며, 중증질환은 100% 국가가 책임진다.

▲ 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공약 현수막들. 이대로만 된다면 '유토피아'가 따로 없을 수준이다.

바야흐로 ‘유토피아’의 예고다. 국제적으론 ‘독재자의 딸’이란 조롱을 받고 있는 박 후보이지만 국내 상황은 호기롭기 그지없다. 단일화의 시너지가 기대에 못 미치며 그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더 견고해 보인다. 여기에 그의 공약들은 진보정당의 그것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의 슬로건으로 점철되어 있어, 야권은 정책적 차별성조차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쯤 되다 보니 박 후보는 “내가 경제민주화를 하는 게 더 파급력이 셀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는 얼마 전 새누리당 경제민주화를 상징하던 김종인 위원장과 가뿐히 결별했다.

언론은 박근혜의 이 ‘빨간 마술’에 취했는지, 정작 15년된 정치인 박근혜의 과거에 무심하고 또 무심하다.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에서 ‘준비된 대통령’으로 선거 슬로건이 급격히 꺽인 까닭 역시 따로 있을 텐데, 언론에게 그런 건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박 후보가 과거 어떤 정치인이었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얼마나 준비를 했으며, 여성을 앞세우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언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있다.

▲ 국회의원 박근혜는 14년간 단 15건의 법안 발의밖에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당대의 사회적 쟁점이나 현실적 이슈와 부합하는 법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체적으로 '부실'하고 또 '무난한' 가운데 '준비된 여성 대통령'의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국회 화면 캡쳐.

박 후보는 무려 14년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5선 의원이다. 이 세월을 그 자체로 ‘정치적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검증해봐야 할 따져볼 대목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박 후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와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부합하는 정치 행보를 보여 왔던 것일까?

국회의원은 ‘법안’으로 말한다. 여의도에는 “국정감사가 의정활동의 꽃이라면 법안은 열매”라는 말이 있다. 이 열매의 측면에서 국회의원 박근혜의 경쟁력과 생산성은 거의 낙제 수준이다. 의정활동 14년간 그가 대표 발의한 법안은 총 15개뿐이다. 연 평균 1건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공동 발의한 법안이 157건 있긴 하지만, 이건 의원들끼리 서로 이름을 올려주는 ‘품앗이’에 가깝다. 말하자면,국회의원 박근혜는 14년간 독자적인 활동은 없이 ‘품앗이’만 해온 셈이다.

발의 건수도 문제지만 내용면에서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박 후보가 발의한 법안 가운데 ‘준비된 대통령’ 차원에서 이해될 만한 것은 2011년 발의한 ‘사회보장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 정도가 유일하다. 그나마 이 법안의 경우 이미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던 가운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당시 한나라당의 당론을 박 의원이 대표 발의한 것 뿐이다.

그 외의 법안들은 모두 ‘준비된 대통령’과는 상관없다. 다수의 법안들은 ‘민원 해결성’이나 ‘기업 편향적’ 차원의 시각이 보이고 있으며 당대의 사회적 쟁점이나 현실적 이슈와 부합하는 법안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측에서는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왔다”고 ‘꿈보다 해몽’에 가까운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국회의원 박근혜의 의정활동은 '부실'과 '무난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 새누리당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인 박 후보는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한다'고 말한다.그래서 박 후보는 지난 14년간 단 15번의 법안 밖에 발의하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걸고 있는 현수막도 '지킬 수 있는 약속' 수준에서 검토해 회수해야 하는게 아닐까?
이러한 경향은 ‘여성 대통령’을 강조하면서도 여성의 권익과 관련한 법안을 단 한 번도 대표 발의하지 않았단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박 후보는 등장 이래 지금까지 여성 정치인의 대표 주자로 대접받아왔고, 이번 대선에서도 여성성을 강조하는 득표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가 단지 생물학적 이유와 이미지 창출 효과라는 점은 박 후보의 의정 활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보통, 여성 정치인들의 경우 이미지 차원에서라도 여성 문제와 관련한 의정 활동에 주력하기 마련인데, 박 후보의 법안 발의를 보면 그런 최소한의 개념과 인식 자체가 없었단 점이 분명하다.

이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란 박 후보의 슬로건이 매우 부실한 토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경험칙에 기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왔다’는 새누리당의 설명대로라면 박 후보는 지금 내걸고 있는 현수막을 거둬들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거둬들여야 할 것이다.

박 후보의 법안 발의 내역을 보면, 전체 15건 가운데 18대(2008~2012) 국회에서 10건을 발의했고, 이전 10년간은 5건 밖에 법안을 발의하지 않았다. 앞의 10년 보다 마지막 4년을 2배나 더 열심히 의정활동을 한 셈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최근에 바짝 준비한 대통령’이 훨씬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18대 국회 재선 이상 국회의원들의 평균 법안 발의 수는 42.7건에 이른다. 법안을 많이 발의하는 것이 최선의 가치는 아니겠지만, 평균치에 비해 박 후보의 능력치는 너무 떨어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박 후보의 영향력을 감안했을 때, 지금 박 후보가 펼치고 있는 공약들의 상당수는 그가 의지만 있었더라면 이미 국회에서 상당 부분 관철해낼 수 있었던 내용들이다.

만약, 그 성과를 바탕으로 박 후보가 대선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도 박 후보의 ‘콘크리트’ 지지율에 냉소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박 후보는 18대 국회 내내 ‘복도 정치’란 걸 해왔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내내 침묵하다가 복도에서 한 마디 툭 내던지는 것으로 역할을 다한 것처럼 굴었다. 물론, 흔한 말로 ‘정치는 생물’이라고 한다. 바뀔 수 있는 것이 정치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행동에 있어 일정한 습관과 반복적인 패턴을 갖기 마련이다. 대통령 박근혜의 행동은 국회의원 박근혜의 행동과 다를까?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김종인을 토사구팽하고, 골목상권을 보호하겠다면 유통법 재개정에 반대하는 당의 박 후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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