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정치 수준은 토론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기자가 19~20일 한국기자협회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를 취재하며 떠올린 어구다. 한 국가의 정치 수준을 토론회가 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주적 의사결정이라는 것이 서로의 의견을 논쟁으로 조율하고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라면 이 말도 완전 거짓은 아닐 터.

이번 대선에서 토론은 실종됐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TV와 라디오 포함 83차례, 2007년 17대에서는 44차례 대담과 토론회가 열렸다고 한다. 반면 18대 대선 후보 토론회는 '0'차례 이뤄졌다. 창피한 결과다.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대선 후보들을 검증할 기회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1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기자협회 초청 토론회'에 참여했다. ⓒ김도연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기자협회 초청 토론회'는 이틀 동안 수많은 취재진의 주목을 끌었다. 이 토론회는 각 대선 후보가 매체를 통해 최초로 유권자를 만나는 자리라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9일에는 문재인 후보, 20일에는 안철수 후보가 기자들과 대담을 나눴다.

하지만 '토론 같지 않은 토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애초에 대선 후보들이 1시간 동안 사회·정치·경제·문화 분야의 쟁점을 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부족한 시간으로 각 분야에 어떤 정책을 내놨다는 것을 소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패널로 나선 기자들 역시 추가적인 질문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느슨한 질문만으로 후보들의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문 후보의 경우 초반 30분 정도는 단일화 방식과 관련한 이야기로 소진했다. 단일화 협상이 재개된 날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언론 주목도가 컸다. 문 후보는 나머지 30분 동안 경제, 사회, 문화, 여성, 안보 분야의 정책을 '언급'만 하다 토론회를 마쳐야 했다. 안 후보는 비교적 간략하고 정갈하게 논의를 이어갔지만 역시 추가적인 질문을 받을 수 없는 제약이 있다보니 정책의 모호성은 해결될 수 없었다.

▲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20일 서울시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기자협회 초청 토론회'에 참여했다. ⓒ김도연

문제는 후보들에게도 있다. 기자들의 질문이 느슨하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정책을 설명하고 국정운영의 비전을 꼼꼼하게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정책 준비가 부족했는지 후보들의 답변 역시 추상적 수준에 머물렀다. 토론회가 급히 잡힌 만큼 후보들이 뱉은 언어도 추상적이고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일례로 양 후보들은 '대통령 임기를 줄이는 것은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식에서 일자리를 창출해 성장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서민을 대변하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다' 등의 모호한 주장을 했다. '어떻게'가 빠져 있는 셈이다.

대선 후보들의 빡빡한 일정 탓에 토론회 준비도 부족할 뿐더러, 기자들의 질문 역시 구체적이지 못하다보니 뱉는대로 '말'이요 쓰는대로 '글'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대선 후보의 워딩을 '받아쓰는' 기자 입장에서 어떤 의미인지 와닿질 않는다.

기자 본인이 궁금해도 받아쓰는 입장에서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은 패널 기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생방송에 어떻게 끼어들 수 있겠나? 하지만 기자의 역할 중 하나는 추상적인 담론을 구체적인 일상의 언어로 대중에 풀어내는 데 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여건에서 기자는 무력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토론회는 보여주기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결론은 수박 겉핥기다.

혹자들은 '토론회가 무엇이 중요하냐 실제 국정 운영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토론회는 미래의 대통령으로부터 받는 '약속'이다. 후보일 때는 후보가 공약을 마음대로 내뱉을 수 있지만 당선이 되고 나서는 그가 했던 말은 '책임'으로 돌아온다.

선거 이외는 막강한 권한을 제어할 수 없는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그들을 토론회로 불러 많은 말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책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논박을 할 만큼의 시간이 보장되는 '진짜' 토론회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세 대선 후보가 음식을 먹고 있다. ⓒ뉴스1

인터넷 방송에서 '먹방'이란 표현이 유행하고 있다. 먹방이란 '음식 먹는 방송'을 지칭하는 인터넷 신조어다. 방장 본인이 무언가를 직접 먹으며 시청자들의 식욕을 돋우거나 짠한 느낌을 줘 방송 시청을 유도한다. 대선 후보에게도 먹방은 빼놓을 수 없는 전략으로 자리매김했다. 선전의 방식이 참 고루하다. 재래시장 먹방을 해야만 서민의 대변자가 되고 민심을 달래는 리더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시간 없다는 말은 하지 말자. 재래시장에 가서 먹방을 찍을 시간에 토론하고 정책을 제시하면 된다. 비용 측면에서도 대선 후보식 먹방보다 토론회가 효율적이다. 정책은 비판을 먹고 성장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먹방보다 토론회가 유권자들의 올바른 선택을 유도할 수 있다.

먹방 잘하는 대통령은 5년 전에도 뽑아봤지 않나? 참고로 네티즌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영화배우 하정우씨를 국내 먹방 최강자로 꼽고 있다. 어쨌든 먹방 대신 토론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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