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유출 사건 이후 태안 주민들의 삶을 그린 <MBC스페셜> '그해 겨울 의향리'가 26일 TV화면이 아닌 스크린으로 관객과 만났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 중인 환경영화제에서다.

이미 지난 3월, 방송을 통해 시청자를 만났던 MBC 한학수 PD는 이날은 열린 공간에서 관객을 만났다. 한 PD는 '황우석 사태'의 주인공을 만난 관객들의 호기심을 의식한 듯 "실제로는 그렇게 위협적인 사람 아니다"라는 농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 MBC 시사교양국 한학수 PD. ⓒ정은경
한학수 PD "저 그렇게 위협적인 사람 아니에요"

'그해 겨울 의향리'는 지난해 12월 기름유출 사고 직후 초기 100일 동안 태안 의향리 주민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격해지는 주민들의 감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차라리 '픽션 영화의 한 장면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잔인한 현실도 거기엔 담겨있다.

한 PD는 "환경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 사건으로 누가 가장 괴로워하는가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언론보도의 초점은 자원봉사자들에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조연일 뿐이다. 봉사자들이 떠나고 나서도 주민들은 그곳에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입으로 이야기를 풀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웃음이 없는 의향리…"주민의 입으로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한 PD가 꼽은 인상적인 장면으로 이런 얘기가 있다.

'그해 겨울 의향리'에는 광대가 꿈인 소현이(8)가 잠시 나온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소현이에게는 고양이에게 '악마의 훈련'을 시키는 게 유일한 놀이다. 고양이를 물통에 물구나무서게 하기도 하고 움직이는 수레에 세워보려 '훈련'을 반복하기도 한다.

고양이를 서커스쇼에라도 데리고 나갈 모양인 건지 웃음이 터졌지만 PD와의 대화를 들으면서 보는 이들은 이내 숙연해진다.

(PD) "왜 광대가 되려고 해요?"
(소현이) "여기 있는 사람들 웃게 해주려고요."
(PD) "사람들이 안 웃어요?"
(소현이) "네. 아이들만 웃지……"
(PD) "사람들이 왜 안 웃을까요?"
(소현이) "재밌는 일이 없어서……"

"그 신이 끝나고 다 웃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녀석 참……. 묘한 말이잖아요." 한 PD의 말이다.

온화한 이미지에 한 번, 거친 단어에 두 번 놀라다

▲ 한학수 PD는 26일 오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환경영화제 관객들과 만났다. ⓒ정은경
한 PD는 보상금 지급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기자들이 조져대면 담당 공무원들은 급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계속 조지면 자기들도 괴로우니까 대충 해서 한 집당 300만원, 500만원 해서 줘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져댄다'는 말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적합한 용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차에 "제 말이 좀 심했나요? '일물일어설'이라고 있잖아요. 한 사물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한 표현밖에 없다고 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황우석 사태' 때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의 온화한 이미지에 한 번 놀라고, 그의 거친 단어에 두 번 놀랐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안 문제는 사시미질 하듯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MBC, 태안 3부작 준비중…"여러분의 성원이 필요합니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MBC는 태안 기름유출 사건을 주제로 두 편의 다큐를 더 준비 중이라고 한다. 태안 주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그해 겨울 의향리'가 1편이고 지금 다른 PD가 취재 중인 2편은 '쭈꾸미'가 주제란다.

웬 쭈꾸미? 한 PD는 "오염에 비교적 강한 쭈꾸미를 관찰, 생태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려는 것"이라고 힌트를 던졌다. 일정대로 간다면 3부는 아마 사건 발생 1주년 특집이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는 "1, 2편 반응이 안 좋으면 1주년 특집을 못한다"며 "MBC가 공영방송으로서 좋은 다큐를 만들 수 있도록 성원해달라"고 호소했다.

"큰 칼이 어깨 위에 주어진 듯…프로그램으로 제 삶의 가치 표현하고 싶어"

▲ 지난 22일 시작된 환경영화제는 오는 28일까지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과 CGV에서 진행된다. ⓒ정은경
취재를 목적으로 참석한 것이긴 했지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물어봤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주제들을 관통하는 무엇이 있느냐"고. 2005년 황우석 사건에서 태안 기름유출 사건으로, 또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소재로 한 <MBC스페셜> '3만5천원의 비밀'(24일 방영)까지.

한 PD는 "97년 입사 때는 깊은 생각이 없었는데 MBC에 들어오고 보니까 PD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권력이더라. 그만큼 큰 칼이 제 어깨 위에 주어진 것이었다. 잘 쓰면 좋은 칼이 되고 잘못 쓰면 사람이 다치겠다 싶더라"고 했다.

"제 삶의 가치를 표현하자 싶었어요. 소수 의견일지라도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는 그 때 당시 시점에선 좀 이르다 싶었던 '호주제 폐지'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 문제' 등의 주제를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의제화 했다.

한 PD는 "그 뒤에 맷집이 세져서 삼성도 다루고 기무사도 다뤘다. 10년간 익힌 재주를 총동원한 결정판이 황우석 사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소수자 인권 문제, 정의의 문제, 사회구조적 거악 등을 다루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제 그 칼이 조금 좀 힘들기도 해요. 무사가 칼을 내려놓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가끔 따뜻한 이야기도 좀 하고 싶고 다른 소재와 장르도 하고 싶네요. 그러다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그땐 또 칼 들고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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