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추석과 설은 아버지의 ‘리모컨 독점 횡포’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평일 저녁 6시부터 시작되는 프로야구중계는 아버지를 TV앞 ‘돌부처’로 만드는 원흉이었으며, 이 시간 동안 아버지의 여집합들-어머니, 나 그리고 동생-은 TV를 볼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야구만 보시지 않는다. 이어지는 중계 하이라이트까지 보셔야 직성이 풀리신단다. 아버지의 리모컨 독점력이 고작 이 수준이면 걱정하지 않는다. 정치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하이라이트 이후에 하는 뉴스와 토론회까지 섭렵하신다. 아버지가 TV앞에 계시는 시간은 장장 저녁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이젠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될 정도다.

추석과 설은 온가족이 모두 모이는 탓(?)에 아버지의 독점력이 조금이나마 수그러드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온가족이 TV앞에 모여앉아 함께 웃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인 추석은 ‘사막 위의 오아시스’나 다름없다. 이쯤에서 우리 여집합들의 나이를 한 번 살펴보자. 할머니는 90세를 훌쩍 넘으셨고 고모는 70세다. 아버지는 50대 후반, 어머니는 50대 초반, 남동생은 20대 초반이다. 본인은 30대를 바라본다.

식상한 아이돌 중심의 추석특집

지난 추석 때는 다양한 나이대의 가족이 리모컨을 중립지대에 놓고 돌려가며 채널을 찾았다. 하지만 매년 비슷비슷한 레퍼토리의 방송이 비슷비슷한 MC와 비슷비슷한 게스트들로 메워진다. 특히 최근에는 ‘아이돌’ 중심의 방송이 TV를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모컨 독점’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아이돌 독점 방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니!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어 또다시 아버지에게 리모컨을 넘겨 드려야 하는가!

MBC <으랏차차! 천하장사 아이돌>(10월 1일 오전 9시 30분)

올 추석도 예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각 방송사는 아이돌을 앞세운 ‘예능’을 중심으로 시청자를 공략하려고 한다. 현재 MBC는 한가위 특집 ‘으랏차차! 천하장사 아이돌’(10월 1일 오전 9시 30분)을 홍보하고 있다. ‘으랏차차! 천하장사 아이돌’은 100명의 아이돌이 출연한다고 해 네티즌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미 ‘아이돌 스타 육상선수권대회’를 기획해 큰 반응을 얻었던 MBC는 올 추석에도 대형 기획으로 아이돌 씨름을 계획한 것이다. 벌써 최고의 ‘씨름돌’이 누가 될지 그 속에서 아이돌 사이의 핑크빛 기류는 어찌될지에 대해 기사가 나오고 있다. ‘미스&미스터 아이돌 코리아 선발대회’도 10월 1일 오후 5시 30분에 전파를 탄다. MBC는 뉴스의 공정성은 잃었지만 적어도 아이돌 영역에선 전문성을 얻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KBS <왕실의 부활! 왕세자 책봉사건>(10월 1일 오후 6시 10분)

KBS 역시 ‘왕실의 부활! 왕세자 책봉사건’(10월 1일 오후 6시 10분)으로 아이돌을 부각시키며 시청률 몰이를 노리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시공간을 넘어선 아이돌의 사랑을 그린다고 한다. SBS 역시 아이돌을 출연시키는 주말 예능을 중심으로 황금시간을 공략하고자 한다. 정리하면 아이돌은 씨름을 했다가, 맛집을 갔다가, 마술도 부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사랑을 한다. 결국 각 방송국들은 올해도 아이돌 장사로 쏠쏠한 재미를 볼 것이다. 우리 같은 여집합들은 보지 않겠지만, 청소년 세대에게 있어서 아이돌과 K-POP은 대세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콘텐츠 개발보다 일회적 시청률만 따지는 지상파

KBS <지구촌 노래자랑>(9월 30일 낮 12시 10분)

사실 아이돌 중심으로 한 추석 기획은 시청률을 보장할 수 있는 예능과 아이돌을 결합한 것으로써 특수한 사례일 뿐이지, 진부한 프로그램 기획들은 언제나 추석과 함께 했다. 마치 연말에 시상식으로 각 방송사가 축제를 벌이듯 말이다. 콘텐츠 개발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보다 일회적이고 시청률 위주의 추석특집 프로만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인 추석 프로그램 중 대표적 클리셰를 찾아보자.

1) 다문화 고부 노래자랑 :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함께 하는 한가위 프로그램. 보통은 오전 시간대를 공략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KBS ‘지구촌 노래자랑’(9월 30일 낮 12시 10분)으로 시청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2) 마술쇼 : 내가 어릴 때는 데이비드 카퍼필드(David Copperfield) 형님이 마술쇼를 주름잡았는데, 최근에는 국내 유명 마술사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듯하다. 데이비드 형님은 삼성 광고에 나오고 있다. 이번 추석에도 마술쇼가 MBC(매직쇼크, 10월 1일 오전 11시 10분)에서 펼쳐진다.

3) 철 지난 영화들 : 사실 대부분이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되던 것들이다. 중간 광고 없이 보는 건 좋지만, 외화는 더빙으로 봐야 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내 기억에 성룡 시리즈를 참 많이 봤던 것 같다.

방송사가 오락 위주로만 기획하고 아이돌을 전면에 내세우는 걸 비판하긴 쉬울 수 있어도, 광고로 먹고 사는 현실을 생각하면 비판이 가혹한 측면도 있을 터. 하지만 방송은 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다양성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기획을 너무나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닐까? 포기를 너무 일찍, 그리고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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