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무대의 막이 내렸다. 8년만이다. 2005년 <배트맨 비긴즈>, 2008년 <다크 나이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 놀란이 창조한 현실의 서사는 처음과 끝의 매듭을 묶으며 그 세계를 완성시켰다.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 고담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어둠의 기사(다크 나이트)는 대속과 순교를 통해 희망을 탄생시켰고, 세계의 종착과 잉태를 매개했다. 태초의 혼돈 속에서 정의가 탄생했고, 그 정의의 존재는 악을 불러냈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모순과 은폐. 공허의 질곡은 다시금 정의를 요청한다. 새로운 시대의 정의는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가. 놀란이 그려 낸 히어로는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는가. 영웅은 고담시 위로 날개를 폈고,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8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 불사조는 비상을 위해 또 한번 움틀거린다. 새 시대의 태양은 다시금 솟아오른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희망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이 시대의 영웅은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가. 현실을 지배하는 악의 근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돼야 하는가. 놀란은 탁월한 영화적 거짓과 속임수를 동원해, 현실을 지시하고 갈파한다. 그리고 종국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추락하면, 올라 갈 길을 찾으면 된다." (rise)

세계의 혼돈과 추락, 그리고 비상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는 현실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미국과 세계를 둘러싼 정세다. 9.11 테러 이후, 세계의 자경단 미국과 악의 축의 대결. 배트맨과 조커는 명백한 메타포였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는 물론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대해서도 현실과의 연계를 부정하지만, 이 지시는 너무나 노골적이다. 놀란의 변명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배트맨 3부작은 9.11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까지의 연대기다. 식도로 넘어간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충분히 동화시키려면, 우선 전작들을 되새김질 할 필요가 있다. 전작들의 현실적 은유를 좀 더 선명하게 영사해야 한다.


미국에게 9.11 테러는 하나의 공포였다. 본토의 한복판이 피격당한 일대 사건은 공황과 증오의 만연을 불러왔다. "정의는 균형이다". 라즈 알굴(리암 닐슨)의 대사는 미국의 압제를 갚아주던 알카에다와 다시금 그것을 되갚던 미국을 연상시킨다. ‘어둠의 사도’는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일관된 기능을 수행한다. 타락한 고담시에 대한 심판. 시대마다 세계와 미국을 휩쓸었던 불안과 위협이다. 고담시는 세계의 축소물이다. 알굴이 밝혔듯, 그것은 한 때 '불황'이란 이름으로도 방문했었다. 아버지 웨인은 경제력과 넉넉한 베풂으로 고담시를 지켜냈다. 라즈 알굴과 어둠의 사도들이 고담시를 습격해 퍼트리는 환각 가스는 강력한 환상과 공포를 유발한다. 가스를 흡입해 환각상태에 빠진 인물들이 내뱉는 "허수아비"란 단말마. 실체를 넘어선 막연히 조장된 두려움. 미국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힘이었다. 때로는 법과 절차를 넘어선 수단을 취해서라도 자국의 지배권과 영향력을 관철시키는 힘. 배트맨은 이 시기 미국을 수호하던 가치와 힘을 대변한다. 웨인의 아버지가 살던 고담시에 필요한 것이 불황을 견뎌내는 경제력이었다면, 브루스 웨인의 고담시를 지켜내는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저지하는 어두운 영웅이다. 공포의 시대엔 허수아비 같은 두려움에 맞서 자위력을 과시하는 '쇼맨쉽'도 훌륭한 무기가 된다. (라즈 알굴, "쇼도 무기란 내 가르침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군") 배트맨은 결국 고담시에 내도한 공포의 습격을 막아내고, 안정을 수복한다. "우리는 안 돼. 범죄는 나날이 첨단을 달리는데, 경찰은 자네처럼 날아다니지도 못하지". 고든이 말했듯, 배트맨의 압도적인 무력은 필요악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힘은 가치판단의 분열을 근원적으로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균형을 넘어선 힘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악당을 등장시켜야만 한다. <배트맨 비긴즈>의 엔딩은 조커의 등장을 예고한다.

 

 

<다크 나이트>의 중심인물 배트맨, 조커, 하비 덴트. 이들은 서로의 대립자인 동시에 한 몸에서 비롯된 다른 얼굴이다. 배트맨이 미국의 군사력과 이면의 억지력을 상징한다면, 하비덴트는 정의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미국의 지향이다. 하비 덴트와 배트맨은 미국의 양면, 백기사와 흑기사(dark knight)다. 백기사는 흑기사의 힘을 빌려서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 배트맨이 고담시에 군림하는 어둠의 조정자이듯,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단일한 권력이다. 세계 제일의 국가는 신흥 부상국들을 짓누르려 든다. 하비 덴트는 법정에서 자신을 겨눈 범죄자를 때려 눕힌다. "이건 중국산 총이잖아. 미국 검사를 죽이려면, 미국산 총을 써야지." 균형을 넘은 압도적 무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하다. 그 명분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한다. 바로 '악의 축'. 부시는 이라크전을 개시하며 대량살상 무기, 악의 현존을 주장했지만 정작 그 살상무기는 없었다. 미국이 딱지 붙이듯 악의 기원을 부여하듯이, 조커는 자신이 악의 화신으로 거듭난 설화를 창조해낸다. 입이 찢어진 사연을 매번 다르게 꾸며내는 것이다. 지문도, DNA도, 이름도, 가명도 존재하지 않는 조커는 말 그대로 미국이 만든 허구의 절대악인 셈이다. 미국의 군사력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선 그 대칭에 '악의 축'이 서있어야 한다. 배트맨이 존재하기에 조커가 존재하고, 조커가 존재하기에 배트맨 역시 존재한다. ("you complete me") 하비 덴트가 기자회견을 통해 조커를 테러리스트라 비난하는 장면에서 이 내포는 더 없이 확실해진다. ("테러리스트에게 굴복해야 할까요?") 결국 미국의 정의는 자신이 창조하고 소탕한 '악'에 의해 더럽혀진다. 하비 덴트는 조커로 인해 투페이스로 변태한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는 혼돈의 조커. 모든 살인을 동전던지기로 결정하는 투페이스. 이 둘은 적대자인 동시에 동일한 절대악이다. 정의로운 국가 미국의 두 얼굴, 투페이스. 하비 덴트는 테러리스트로부터 고담시를 구한 영웅으로 가공되고, 배트맨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은 정의를 관철했지만, 그것은 가상의 악이란 거짓을 밟고 선 거짓 평화인 것이다.

 

 

그로부터 8년. 고담시는 안온하다. 강력한 치안법률 하비덴트 법(애국자 법)과 범죄자들을 감금한 블랙게이트(관타나모 수용소)는 평화를 지탱하는 양 축이다. 고요한 거리엔 빈곤이 들어섰고, 가난의 연쇄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족쇄가 된다. (셀리나 카일, 캣우먼은 생존을 위해 범죄에 발을 들인 후 끝없는 전과의 연속에 빠져든다. 그녀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클린 슬레이트를 갈구한다.) 마르지 않는 부를 소유했던 웨인가 역시 적자의 내리막에서 기울고 있다. 불황은 다음 시대를 위한 거름마저 앗아가 버린다. ("왜 고아원에 기부를 그만뒀죠?" "회사가 계속 적자였으니까요.") 테러와의 전쟁으로 빗겨 쌓은 누각위로, 경제위기가 불시착했다. 불행한 자들은 더욱 더 불행해지고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암투를 거듭한다. 전산망을 통해 모든 프라이버시를 획득 할 수 있고, 어린 꼬마도 스마트폰으로 타인의 과거를 조회하는 시대. 지문을 훔쳐 금융조작을 감행하고, 파티의 음식값을 내는 것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자하는 위선의 시대. 이 모든 지배적인 것들의 총체적 균열은 결국 거대한 재앙을 소환하고야 만다. 웨인가의 재력을 가로채기 위해 대거트가 불러온 어둠의 사도. 베인. 그의 말처럼 이 위험과 모순이 공포의 상징 같은 마스크를 쓰기 전 까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베인은 고담의 지하를 굴착하며, 파멸의 계획에 착수한다. 발밑에서 다가오는 절망의 침투. 소용돌이에 휩싸인 고담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든 청장은 말한다. "우리에겐 배트맨이 필요해". 테러의 시대에 법을 넘어선 힘으로 미국을 움직이고 또 추락시켰던 가치. 그 가치의 담지자 배트맨. 오늘날 배트맨은, 그리고 영웅은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무엇을 수호해야 하는가. 추락한 세계가 다시 비상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겐 어떤 영웅이 필요한가.

 

- 다음 편에 계속 -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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