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여진 칼럼] 지난주 막을 내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모두에게 꽤 진한 여운을 남겼다. 드라마는 모두가 같은 욕망을 꿈꾸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이끄는 ‘가짜행복’에서 해방으로 가는 길에 대해 묻고 있었다. 쉽지 않은 주제임에도 배우들의 맛깔나는 연기와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대사가 귀에 박혀, 내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했던 것 같다. 작가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중 하나는 사랑, 행복이라는 단어가 이미 그 순수하고 고귀한 뜻을 잃어버렸기에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를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새로운 단어의 등장은 더 이상 기존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한다. 개념으로 정립된 언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비틀어지고, 의미가 반감되어 퇴색돼 버려 새로운 언어로 전달해야만 하는 경우이다. 주인공은 ‘사랑으로는 안 돼, 나를 추앙하라’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추앙이라는 말은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고 응원이다. 그것이 사랑이고 믿음일 텐데, 굳이 ‘추앙’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기존의 언어들이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둘러보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많은 말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그뿐인가, 더 많은 언어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내가 하는 사랑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다르고, 우리가 말하는 정의는 저들이 추구하는 이익에 기반한 정의와는 다르다고 사족을 붙이고 말하는 일이 적지 않다. 우리끼리, 우리 세대에서는 쉽게 이해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보고 화들짝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민주화되었다”는 말이 청년들에게 정의를 강요하는 일방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개개인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았던 국가폭력의 시대에서 민주적 절차와 제도가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민주화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 깨부수어 없어져야 할 개념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언어의 의미와 개념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안타까웠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개혁이라는 단어도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어떻게 개혁해서 바뀌게 될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공허한 말에 머물게 된다. 최근 서울민예총에서 언론개혁을 위한 예술가들의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굿,바이 展>이 문제적이다. 포스터에 기자들의 실명을 적은 악의적(?) 캐리커처가 언론개혁을 염원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름이 오른 기자들이 어떤 기준으로 본인의 이름을 올렸는지 묻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포스터를 보는 시민들이 예술인들의 기준에 설득할 수 없다고, 혹시 정파적이거나 감정적으로 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 순간 ‘개혁’이라는 언어는 이미 퇴색이 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해방클럽 사람들이 만든 강령이 있다. 첫째 행복한 척하지 않기, 둘째 불행한 척하지 않기, 셋째 정직하게 보기. 여기에 ‘행복’, ‘불행’이라는 단어 대신 정의나 개혁을 넣어보면 어떨까. 정의로운 척하지 않기, 개혁적인 척하지 않기 그리고 정직하게 보기.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한 시간이다. 성찰하지 않으면 우리가 쓰는 언어들이 힘을 잃고 버려지게 될 것이다.

*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957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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