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처음 느끼게 된 영화는 2008년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였습니다.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범으로 등장하는 하정우의 음산하고 기괴한 이미지는 시종일관 영화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극장문을 나와서도 그 음산한 기운이 여전히 느껴질 정도였죠. 그 후 하정우는 본인의 최고 흥행작 '국가대표'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커리어를 차근차근 쌓아갑니다. 그의 축적된 커리어가 마침내 2012년 제대로 발산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달 개봉한 '범죄와의 전쟁'에서 엣지 넘치는 스타일에 냉정하고 잔혹함을 서슴지 않는 부산 최고의 조폭 최형배 역으로 다시 한 번 하정우라는 배우의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효진과 함께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러브픽션'으로 선보입니다. 바로 이전 영화에서 보여줬던 이미지하고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선을 보이는 건데, 예고편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져서 과연 본편은 어떨지 기대를 모았었습니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소심하고 제대로 된 연애를 늘 갈구하던 소설가 구주월(하정우)은 친한 선배이자 출판사 대표(조희봉)와 함께 베를린 필름마켓 행사장을 방문했다가 그 곳에서 영화 수입업체에서 일하는 희진(공효진)을 우연히 마주하게 됩니다. 그 순간 주월은 속된 말로 '첫 눈에 뿅 가게' 되고 그 후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게 되는 알콩달콩(?) 애정행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예전 70~80년대 영화를 연상케 하는 설정과 배우들의 목소리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데요. 바로 주인공 구주월이 집필하고 있는 소설이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됩니다. 작가의 생활과 인생관이 소설에 반영하는 것을 의식하여 곳곳에 코믹하게 삽입된 구주월의 소설 속 인물들은 실생활에서 구주월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거나 있는 인물들이 구주월의 생각에 투영되어 등장합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소설은 금세 이야기 전개가 멈춰버립니다. 구주월의 집필 작업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채식주의자인 구주월은 감자탕을 좋아하는 엑스 걸프렌드(유인나)에게 차이게 되고, 이후 그의 소설은 좀처럼 전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구주월의 친구들은 제대로 된 연애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내려주고, 구주월 또한 가슴 뛰는 그런 사랑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이희진(공효진)을 만나게 됩니다.

베를린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구주월이 읽고 있는 책은 다름 아닌 괴테의 '파우스트'입니다. 책을 읽다말고 구주월은 옆자리에 있는 M(이병준)에게 자신의 애정상담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M은 구주월의 자아를 반영하는 가상의 인물이자 거울입니다. 왜 이니셜이 M일까 생각해봤는데, 괴테의 '파우스트'에 보면 자살충동에 빠진 우울과 환멸에 빠진 파우스트에게 제안하는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의 영문 이니셜을 차용한 일종의 오마주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메피스토텔레스도 결국 자의식의 혼란에 빠진 파우스트가 기대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자아를 대변하는 것처럼, 때로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구주월도 '또 다른 자아' M을 통해 위로받고 노력의 원동력으로 삼게 된다는 점이 파우스트의 구성을 차용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존 로맨틱 코미디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구성 외에도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주된 특징 중 하나는 대사들이 독특하고 때로는 현학적인 어구들이 등장하는 데도 주연배우들의 입에 착착 달라붙어 맛깔나게 소화된다는 점입니다. 철학을 전공한 전계수 감독의 성향이 대사 곳곳에 반영된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죽자살자 덤벼들며 온갖 정성을 쏟지만, 채 1년도 안 되어 식어버리기 시작하는 사랑의 열정, 여친의 과거에 대한 의심으로 인한 갈등, 그리고 사소한 일로 인해 말다툼을 펼치는 모습 등 남녀간의 애정사가 현실감 있게 그려지는 것도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가장 큰 필살기는 정신없이 자지러지게 만드는 유머코드입니다. 특히 이 영화의 최대의 반전장면이 나오는 순간, 관객의 웃음소리는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 반전을 일으키는 소재는 더 이상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주연배우 하정우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소심하고 찌질한 구주월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냅니다. 정말 영화잡지의 어느 기자가 얘기한 것처럼 어느 자리에 갖다놔도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펼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공효진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독특한 캐릭터의 의문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이희진 역에는 다른 배우를 대체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끔 자신의 캐릭터를 소화해냅니다.

조연배우 조희봉, 이병준, 곽도원, 그리고 주월의 친구들로 등장하는 홍대 인디밴드들의 조연이 영화를 한층 맛깔나게 만들어줍니다. 우정출연한 지진희와 유인나도 양념역할을 톡톡히 하는데 특히 주월(하정우)의 찌질한 형으로 등장하는 지진희는 평소 이미지와 정반대의 모습을 선보이면 웃음을 선사해줍니다.

비록 빵 터지게 만드는 반전 장면 이후 영화가 다소 지루하게 늘어지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월과 인디밴드의 뮤직비디오 음악을 들으면 어느새 어깨가 흥겹게 들썩거리게 됩니다. 잘 짜인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연기력이 조화를 이룬 영화 '러브픽션'. 모처럼 극장에서 시원하게 웃고 싶으시다면 강력히 추천해 드립니다.

대중문화와 스포츠는 늙지 않습니다(不老). 대중문화와 스포츠를 맛깔나게 버무린 이야기들(句), 언제나 끄집어내도 풋풋한 추억들(不老句)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나루세의 不老句 http://blog.naver.com/yhj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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