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의 ‘일산 어린이 폭행 및 납치미수 사건’ 늑장수사 관련 신문보도에 대한 논평 -

3월 26일 벌어진 일산 초등생 폭행 및 납치미수 사건의 용의자가 31일 저녁에 붙잡혔다. 사건 발생 초기 경찰은 범행 장면이 CCTV로 범행 녹화되었는데도 이 사건을 ‘단순폭행’으로 처리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피해 어린이의 부모가 직접 나섰고, 30일 이런 내용이 방송을 통해 알려져 국민의 분노를 샀다.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흉악범죄가 잇따라 발생해 온 국민이 마음 아파하며, 민생치안을 걱정하고 있다. 그나마 이번에 범행 대상이 된 어린이가 더 큰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데 위로를 받아야 하는 형편이다. 국민들의 이런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이 대상 범죄를 가벼이 처리한 경찰의 안일한 대응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일선 경찰의 안일한 대처를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로 냉정하게 따져볼 것이 있다. 바로 민생치안을 보장할 수 있는 근본 방안이다. 지난 달 22일 이명박 대통령이 ‘어린이 대상 흉악범죄 방지책 마련’을 지시하자 26일 어청수 경찰청장은 ‘어린이 납치·성폭행 종합 치안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바로 이날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흉악범죄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민생치안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일선 경찰들이 민생치안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기도록 하고, 민생치안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수뇌부가 발표하는 그 어떤 강경 대책도 현실에서 효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법질서’를 강조하면서 ‘체포전담반 신설’을 비롯한 집회·시위에 대한 강경대응을 지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찰은 등록금 폭등을 해결해달라는 학생들의 평화집회에 1만 4천여 명에 달하는 경찰을 동원했다. 경찰의 ‘늘어난 일’은 또 있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교수들을 ‘사찰’하고, 야당 정치인의 선거유세 현장을 따라다니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단체에도 ‘새로 담당을 맡았다’며 경찰이 찾아와 ‘인사’를 하고 다닌다. 이러니 민생치안이 뒷전으로 밀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일선에서 활동하는 경찰들이 모두 무능하거나 안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는 경찰들이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는 분위기와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론이 이번 초등생 납치 미수 사건을 안일하게 처리한 경찰에 대해 책임을 묻는 동시에, 경찰이 민생치안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이명박 정부가 경찰들을 ‘정치적 잡무’에 동원하지 않도록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신문들은 경찰의 잘못을 질타하기만 할뿐 이른바 ‘시국치안’에 주력하는 새 정부의 방침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경찰서에 달려가 질타한 덕분에 범인을 빨리 잡았다’는 식으로 대통령을 추켜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4월 1일 조선일보는 사설 <경찰, 무능한 건가 넋이 나간 건가>에서 “이 정도면 경찰관의 유·무능 여하나 성실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경찰관들의 지능을 검사해 봐야 할 판”, “정말 구제불능 경찰이랄 수밖에 없다”며 경찰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사설 <경찰, 변할 수 없는 조직인가>에서 “경찰이 무사안일과 구습에 빠져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겠다”며 “경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임무를 못한다면 줄이거나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 역시 <이런 경찰 믿고 어떻게 아이 키우나>에서 “이런 조직에 치안을 맡겨야 하는지 분노가 치민다”며 “범죄예방에 무심하고 범인 안 잡는 경찰 조직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경찰을 질타했다. 하지만 이들 사설에서 새 정부 들어 경찰력을 ‘시국치안’에 집중시키는 데 대해 지적하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일반 기사에서도 야당이 ‘민생은 소홀히 한 채 정치적 사안만 신경쓰기 때문’이라고 경찰을 비판한 내용을 짧게 전했을 뿐이다. 오히려 <이 대통령 “경찰 이래선 안 돼”-일산서장 “잘못했습니다”>(중앙일보), <3일뒤 뒷북수사 대통령 한마디에 당일 검거>(조선일보), <주민 신고엔 뒷짐졌던 경찰 대통령 질책 6시간 만에 검거>(동아일보) 등 경찰의 무능과 안일에 ‘대통령이 나섰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한겨레는 사설 <얼빠진 경찰, 본분으로 돌아가라>에서 ‘등록금 인상 반대집회’ 당시 경찰의 과잉 대응을 거론하며 “지휘부의 관심이 온통 시국치안에 쏠렸으니, 민생치안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경찰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이가 ‘법질서’를 강조한 이명박 대통령”이라며 “그런 그가 이제 와 경찰을 꾸짖고 있으니 어색하기 그지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사설 <헛말이 된 경찰의 어린이 치안대책>에서는 경찰이 민생치안에 소홀하게 된 근본 원인을 언급하지 않아 아쉬웠다. 하지만 같은 날 사설 <정치사찰, 관권선거 되살아나나>에서 ‘운하반대 교수에 대한 정치사찰’을 지적하며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연상케 하는 정치사찰·관권선거 기도와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선진화’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14면 기사 <연일 전시성 캠페인 ‘거꾸로 가는 경찰’>에서는 “경찰이 전시 행사에 집중하는 동안 민생치안에는 허점이 노출됐다”며 “평화시위를 진압할 경찰 병력은 있어도 어린이 범죄에 대처할 여력은 없느냐”는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중앙일보가 주장한 것처럼 경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도 경찰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깊이 각성하고 민생치안에 온 힘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특히 힘없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파렴치한 범죄에 철저하게 대비해주기 바란다.

또 대통령이 일선 경찰에게 ‘민생치안’을 독려하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찰이 민생치안에 주력할 수 없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경찰이 ‘시국치안’, ‘정치사찰’에 역량을 낭비하는 사이 민생치안은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이 구멍을 메우지 않은 채,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이 일일이 경찰서를 찾아 경찰을 질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경찰을 비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합리적인 언론이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민생치안을 위해 대통령과 정부, 경찰수뇌부, 그리고 일선 경찰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따지고, 그것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보수신문들의 ‘민생치안’ 보도는 함량미달이다.

2008년 4월 1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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