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 겨울이 깊어졌습니다. 지붕에 쌓인 눈은 녹을 줄 모르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는 산새들이 아침, 저녁으로 집 주변에서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그렇잖아도 짧은 해는 산에 가려 동지 지난 지 20여 일이 되도 나아질 기미가 없습니다. 어둑해지면 먹이를 찾아 집주변까지 내려오는 멧돼지들 때문에 온이는 정신없이 짖어대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기 바쁩니다. 나무하러 산에 다니고 톱질하고 도끼질 하고 불 때고 나면 하루가 지납니다.

멀리 계곡에서 집까지 끌어온 물은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에 얼었고 마을 위쪽에 있는 우물만 겨우 집안을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우물은 양이 적어 마음껏 쓸 수는 없지만 계곡물보다 따뜻해선지 추위가 닥쳐도 흐르기만 하면 잘 얼지는 않습니다. 산골겨울을 몇 해 지내다보니 경험이 생겨 지금은 집안에 우물물이라도 흘러 불편을 많이 없앴지만 첫 해 겨울에는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방만 하나 겨우 만들었으니 부엌도 제대로 없었고, 집안으로 물을 끌어들인다고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씻을 곳도 없어 밖에 천막만 두르고 씻는 곳으로 썼으니 아이들도 춥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집은 추위 피할 방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알았습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물과 불을 쓸 때는 물과 불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어렵습니다. 높은 곳에서 힘차게 끊임없이 나오던 계곡물은 어떤 추위가 닥쳐도 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첫 추위가 다가오자 그렇게 힘차게 나오던 계곡물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맥없이 얼었습니다. 흐르는 물은 얼지 않는다는 상식이 한방에 뒤집어졌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물도 아니고 수압이 얼마나 센지 맨 몸으로 맞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맥없이 얼어버린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고 못하고는 머릿속 일이고 당장 집안에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길어 날랐습니다. 밥하고 씻는 물은 그나마 감당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빨래하는 날에는 물 길어 나르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에 물이 어려움 없이 나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일을 덜어주는지, 얼마나 편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난방을 전기나 기름, 가스로 하고 방안에서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불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산중은 모든 난방을 나무로 하기 때문에 불을 눈앞에서 항상 보고 살아야 합니다. 물과 불을 돈으로 대체 할 수 없고 다른 사람 힘에 의지할 수도 없으니 하루해가 짧은 겨울에 물 길어 나르고 나무하고 불 때야 하니 하루가 바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겪는 산중겨울이라 물에 대해서만 서툰 게 아니고 나무하는 일에도 서툴렀습니다. 의욕만 가지고 열심히 나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산에는 위험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톱질하다 손가락을 베이는 바람에 피가 멈추지 않아 병원에 가기도 하고 다른 나무에 기대있던 나무가 발등으로 떨어져 발을 빼내지 못해 발버둥치기도 했습니다. 산에서 나무하는 일에 위험이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고 의욕으로만 덤볐으니 지금 생각하면 며칠 동안 발을 절룩이고 손가락을 몇 바늘 꿰매고 산을 다녀야 하는 정도에서 첫 겨울을 보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다치고 눈밭을 구르며 물과 불 때문에 몸 바쁘게 긴 산중겨울을 지냈지만 처음 겪는 산중 삶이 꼭 고단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지금껏 삶에서 경험하지 못한 여러 가지 산 생활이 신기하기도 했고 나무하러 다니면서 만나는 다양한 산새들을 보면서 감동하기도 하고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산속을 혼자 걸을 때 느끼는 고요함은 삶의 신비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찬바람과 눈보라를 맨 몸으로 맞으면서 겨울을 지내는 나무들을 보면서 삶의 솔직함도 느꼈습니다. 겨울나무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겨울눈을 밖으로 드러내 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찬바람과 눈보라가 내 삶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하든 피하려고 합니다. 일부러 찬바람과 눈보라를 맞을 필요는 없겠지만 피하려고 다른 사람을 찬바람, 눈보라에 내모는 것이 지금 우리 문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 삶도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는 나무는 봄이 오면 무성한 삶을 피워냅니다. 찬바람과 눈보라를 맨 몸으로 이겨냈기 때문에 봄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고 삶을 풍성하게 피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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