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여야에 불어닥쳤던 쇄신의 태풍이 점차 갈 길을 찾고 있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은 소위 쇄신 연찬회를, 민주당은 손학규 대표와 박지원 의원의 합의를, 진보정당들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의 3자 통합 합의를 기점으로 향후 행보의 가닥을 어느 정도 잡게 된 셈이 됐다.

한나라당 쇄신은 결국, 다시 박근혜 체제냐 그냥 홍준표 체제냐, 관건은 공천권

한나라당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소위 쇄신 연찬회에서 홍준표 대표가 '박근혜 전 대표가 책임을 맡을 수 있다면 사퇴할 수 있다'는 언급을 하면서 각 계파별로 날선 공방이 오고 갔는데 문제의 핵심은 역시 내년 총선에서 어떤 판을 만들 것이냐 하는 점이었던 것 같다.

구-친이계와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의원들은 최근 정국에 대해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것이 내년에 자신들을 실업자로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들로서는 그래도 당 내에서 대중적 인기를 가장 많이 얻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책임지고 리모델링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다른 체제를 만들 수 있고, 이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어필해야 내년 총선에서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 박근혜 전대표ⓒ연합뉴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는 이들의 이러한 생각에 별로 찬성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거 공학을 중심에 놓고 판단할 때 대권주자가 선거가 1년도 넘게 남은 지금부터 전면에 등장하면 미리 온갖 검증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고 그러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되고 지지율이 떨어지고 언론은 이것을 대서특필하고 이것 때문에 다시 실수를 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는 등판 시기가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

그럼 박근혜 전 대표가 본인이 전면에 나서길 원하는 시기는 언제인가? 마지노선은 2012년 총선일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고 가정할 때 2012년 총선의 결과에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가 운영이 수월할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2012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면 박근혜 전 대표는 대통령이 되더라도 성공적인 국정수행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박근혜 전 대표로서는 총선만큼은 본인이 책임지고 치러야 한다는 절박감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공천'이 문제다. 박근혜 전 대표가 총선을 책임지려면 당연히 공천 문제에도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박계가 '학살 당했다'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2008년의 공천처럼 한 계파가 다른 한 계파를 죽이는 방향으로 공천 심사가 진행되면 당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니 홍준표 대표 체제는 중간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친박계는 그가 구-친이계 편을 들까봐 불안하고 구-친이계는 그가 친박계에 흔들릴까봐 불안하다.

이 불안감의 다른 측면에는 홍준표 대표가 본인 위주의 공천을 진행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존재한다. 평생 비주류였던 홍준표 대표 입장에서는 대표가 된 김에 자기 세력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친박계와 구-친이계 사이의 갈등을 중간에서 잘 조절하여 이러한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홍준표 대표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있다. 연말 예산국회와 총선 전 새 판짜기 구도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국민들로부터의 쇄신의 요구가 강해지면 제 아무리 홍준표 대표라도 끝까지 압력을 견디지는 못할 가능성도 물론 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과 같은 당 내의 상황이 이어진다면 결국 총선 전까지는 홍준표 대표 체제가 이어질 것이고 한나라당은 계속해서 내부적인 혼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 박지원 전 원내대표(왼쪽), 손학규 대표ⓒ연합뉴스

기득권 내놓기 게임이 된 '야권 통합'

이제 시선을 범야권으로 옮겨보자. 이쪽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권통합과 통합진보정당과의 선거연합 문제가 핵심일 것이다. 일단 지금까지는 민주당 대 혁신과 통합의 문제와 그리고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통합연대 간의 문제, 양 쪽의 전선이 그어져 있었다.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의 문제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여기에 구원(舊怨)의 문제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시기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아 사실상의 분당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2007년 다시 합쳐지는 과정에서 친노세력은 그야말로 '폐족'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으며 대선 패배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다시 친노세력이 힘을 얻게 되자 당 외에서 계속해서 몸집을 불려온 그런 상황적 맥락이 있는 것이다. 범민주당 계열의 양대 세력의 갈등이 통합을 쉽게 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 문제가 통합을 방해하는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보다 현실적인 두 번째 문제는 야권의 통합이 반드시 '정치개혁'을 전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제도의 개선과 좋은 정당 만들기 등의 장밋빛 청사진을 이야기 하는 것도 물론 정치개혁이지만 보다 직접적인 방법은 공천개혁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것이다. '물갈이 공천'이야 말로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개혁의 ABC였다.

하지만 공천개혁은 누구를 대상으로 해야 하는가? 결국 그 타깃은 민주당의 실질적인 텃밭인 호남지역의 정치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이것은 일종의 '아킬레스 건'이다. 호남에 전통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이 대놓고 '통합에 반대 한다'거나 '공천개혁에 반대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민주당 단독으로 전당대회를 개최해야 한다' 거나 '공천은 국민참여경선으로 해야 한다'거나 '통합 여부를 표결로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차기 당권에 도전할 것으로 유력시됐던 박지원 의원이 이러한 주장을 대표적으로 내세우고 있어 통합의 걸림돌로 지목되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오히려 박지원 의원이 중간에서 수습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어차피 손학규 대표나 정동영 의원 같은 영향력이 큰 정치인들은 공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도 없고 뒤를 돌아볼 처지도 아니니 일단 통합을 해서 대선에서의 승부를 유도하는데 집중하겠지만 중앙정치에 영향력이 부족한 정치인들의 경우엔 공천을 못 받으면 당장 4년 먹고 사는 것이 걱정이므로 이 문제에 결사적인 태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군가 이러한 여론을 통합이 되는 방향으로 수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 노력을 손학규 대표가 아닌 박지원 의원이 하고 있는 모양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물론 국민들의 관심이 쏠려 있으니 당 대표가 나서서 당의 민감한 얘길 늘어놓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 손학규 대표와 박지원 의원이 통합에 대한 기본적인 로드맵을 합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앞으로 남은 길이 구만리라는 점에서 이 문제가 언제 다시 불거질지 예측할 수 없고,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던 시절처럼 통합적인 리더십이 구축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는 2003년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야권통합의 프로세스는 점점 뒤로 늦춰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진보정당 세력과의 선거연합 논의도 시간에 쫓겨 완전히 헝크러질 가능성이 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총선 국면에서 진보정당에게 일정 수준의 배려를 보장하지 않을 경우 대선 국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야권통합에 동의하는 세력이 통합의 전체적인 로드맵을 제출하고 이를 책임 있게 이행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시기상조인 문제제기가 아니다.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통합을 하고 싶다면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모두가 어느 정도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특히 손학규 대표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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