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최남단으로 가면 유네스코 공식지정 생물권 보존지역 ‘강정마을’이 있다. 1Km 넘게 해변가를 따라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전국 유일 용암 너럭바위 ‘구럼비’, 수백 년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크고 작은 위로를 주었던 바위틈 용천수 ‘할망물’, 천연기념물 442호 ‘연산호’ 군락과 멸종위기종 ‘붉은발 말똥게’, 은어가 살고 있는 서귀포시민들의 식수원 강정천, 제주의 상징이 된 올레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제주올레 7코스’ 등 강정마을을 자랑하는 주민들의 자부심은 하늘에 닿는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올레길 7코스를 걷다가 강정 해변가를 만나 중덕 구럼비 바위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왜 여기가 제주 최고 ‘일강정’이라고 불렸는지 단박에 알 수가 있다. 말 그대로 “와서 보시오”다.

4년 전부터 강정마을 주민들의 해군기지 반대 운동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천 리가 넘는 하늘길이 너무 멀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평화 활동가들이 구속되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가 ‘해변의 신부’를 자임하며 강정마을로 거처를 옮기고 ‘평화상단’을 시작하며 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행기 삯 걱정은 나중에 하자며 제주행 비행기 표를 샀다.

▲ 천주교 제주교구는 11일 오전 제주 해군기지 건설예정지인 서귀포시 강정동 중덕해안에서 '제주평화의섬 실현과 강정마을 공동체 회복을 위한 생명ㆍ평화 기원미사'를 봉헌했다. ⓒ연합뉴스
필자는 다소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 어떤 일을 위해 활동하거나 지지하고 연대하는 데에 꼭 논리 정연한 이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드러나 있는 사실과 현상들에 내 경험과 신념을 보태 “아니다”라고 판단되면 반대해 왔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제주가 어떤 곳인가? 온 국민 신혼여행지이자, 가족 ․ 친구들과 큰마음 먹고 몇 년을 별러야 떠날 수 있는 휴양지가 아닌가? 섬 구석구석 절경․ 비경 아닌 곳이 없고 아무 식당이나 문 열고 들어서도 맛집 아닌 곳이 없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이 있고,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관광지, 아름다운 섬 제주는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겐 ‘로망’이지 않은가?

그런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데, “아 제주에는 해군기지가 너무도 잘 어울려”라며 반길 사람이 대한민국에 누가 있겠는가? 해군기지와 관련되어 어떤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분들이라든지, 60년도 넘은 한국전쟁을 아직도 생생히 증언하시면서 ‘안보’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만 하면 특별한 조건 없이도 열렬히 찬성하실 수 있는 ‘어르신 모임’의 회원분들이 아니고는, 한국사람 중에 제주 해변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자고 박수치실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왜곡되고 조작된 4년 전의 주민투표를 다시 언급한다고 해도 말이다.

해군은 만일 중국이 ‘이어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분쟁을 일으킬 경우, 부산 작전사령부에서 출동하려면 21시간(481km)이 걸리는데, 중국은 14시간(327㎞), 일본은 15시간(337㎞)이 걸리기 때문에 이어도까지 8시간(174㎞)이 걸리는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힘과 선점의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또,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매우 아름다운 항구 ‘미항’이 될 것이며, 제주의 명소가 되어 장병들의 소비가 발생하고, 일자리가 창출되며, 관광객 방문이 늘어나고 항만공사와 군 아파트 건설 공사 등으로 지역 업체들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경제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홍보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중국의 침략을 막고 주민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치나 경제를 잘 모르면서 무지하게 떠든다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군의 이 주장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다 믿어준다고 해도, 고작 그런 이유로 수천 년 동안 보존되어 온 생태의 보고이자, 농사짓고 물질하며 평화롭게 살아 온 마을 주민 공동체를 파괴할 수는 없다. 급변하는 국제사회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중국이 이어도를 빼앗으려 침공하고, 일본이 독도를 먹으려고 자위대를 출동시킨다는 시나리오는 아무리 애국심을 발휘해도 지나치고 넘친다.

▲ 6일 오후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열린 '제2차 해군기지 백지화 촉구 제주강정평화대회'가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해군기지 결사반대' 구호가 적힌 깃발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강정주민들과 강정해변을 지키고 있는 ‘불순․ 외부세력’들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냥 구럼비 해변을, ‘평화의 섬’ , ‘세계 7대 경관’이라고 정부가 나서서 홍보하는 제주의 돌멩이 하나, 꽃 한 송이 건드리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두라는 것뿐이다. 무엇을 지어 달라는 것도,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두라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인가? 이번 폭우와 태풍으로 다 무너져 버린 4대강 삽질 때도 제발 그대로 두기만 하라는 국민의 호소를 시멘트로 묻어 버리긴 했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이 정부에게는 무척 힘든 일이긴 한가 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제주 4․3사건’이라고 바로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설령 정답을 알고 있더라도 ‘제주 4․3사건’의 진실과 그 피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2000년 1월 국회를 통과한 '제주 4·3사건 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1)

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통계로만 보아도 사망자가 10,729명이고, 행방불명자가 3,920명,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이 207명이다.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의 숫자가 못해도 수천은 넘을 것이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2만 명이 넘는 제주도민들이 죽거나 행방불명 된 이 참혹한 사건은 육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역사속의 한 장면일 뿐이지만 제주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며, 지금도 진행형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공식적으로만 1만 5천 명인데 부상자가 고작 207명이라는 것은 부상자가 적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참혹한 사건인가.

이러한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제주사람들은 공권력의 움직임에 몹시 민감하다. 특히 육지에서 경찰이나 군대가 섬으로 들어오는 일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해방 66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절에 제주는 다시 4․3의 악몽에 휩싸였다. 서울 ․ 경기 지역 5개 중대 600여 명의 경찰과 물대포 차량 3대, 진압장비차량 10대, 대형버스 16대 등이 제주항으로 입항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입도’ 목적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지만,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려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 활동가들을 강제진압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얼마나 성심성의껏 일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여야 합의로 국회에 제주 해군기지 특위도 만든다고 하고, 야당의 진상조사 보고서도 발표되었다. 또, 해군기지 사업의 정당성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아직 남아있고 제주도의회에서는 해군기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회의도 소집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광복절 연휴에 대규모 병력을 제주에 입도시킨 정부의 의도야말로 불순하지 아니한가? 제발, 타고 들어 온 배를 그대로 다시 타고 뭍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지난 4년간 강정 주민들이 모든 것을 다 걸고 싸워왔고, 전국에서 수백 명이 강정에 모여 힘과 마음을 모았고,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인 수장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제주교구장 주교가 구럼비 해변에서 집전한 생명평화미사에는 1천 명이 넘는 이들이 참여했다. 전국의 활동가들과 양심 있는 시민들이 수시로 강정을 찾고 있고, 구럼비를 위한 모금과 서명이 이어지고 있다. 오는 9월 3일에는 전국에서 평화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모인 이들이 올레길 7코스 걸으며 구럼비 해변에서 평화축제도 열 예정이다.

강정에 머물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막는 일은 가능할 것 같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던 이들도 일단 구럼비 해변에 와서 보고나면 누구나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절박한 강정 주민들을 대신하여 힘과 마음을 모아 달라고 호소하고 싶다. 혹 의심스러우면 “와서 보시오”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강정의 평화가 우리의 평화라는 진리가 새삼스럽다.

1)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에 6만여 명의 일본군을 주둔시켰다. 1948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일본군이 철수하고 섬 밖에 나가 있던 제주인들이 다시 제주로 귀환하였다. 이 급작스런 인구변동은 제주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귀환한 제주인들의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했고, 극심한 흉년으로 식량과 생필품도 모자랐다. 일제시대의 경찰들이 그대로 미군정의 경찰이 되었고, 군정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주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에 의해 주민 6명 사망하면서 제주 4․ 3사건이 시작되었다. 3월 10일에는 ‘3․ 1발포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총파업이 일어났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미군정은 도지사와 미군정의 지휘부를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으며 뭍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보내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1년 동안 2천 5백여명이 체포되었으며 1948년 3월에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급기야 1948년 4월 3일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고 미군정은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수차례의 충돌을 거치며 사태가 확대되자 11월 17일 제주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도로 몰려 사살되었고 피난을 떠났다. 잠시 소강사태였던 제주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제주에는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등이 대거 예비검속으로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 3 사건 관련자들도 모두 즉결처분되었다. 1954년 한라산 출입금지 구역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에서 시작된 제주 4․ 3 사건은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