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연극 등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원작을 봤다면, 그것을 논하면서 중립을 지킨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굉장한 위험부담을 안고 제작된 것입니다.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혔냐는 차치하고라도, 원작의 아련한 기운을 잊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영화로 인해 마음속에 간직한 무언가가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것이기도 하고요.

저 역시 처음에 <상실의 시대>가 제작된다고 했을 때는 우려부터 앞섰습니다. 이건 누가 만들어도 결국 '찬사 아니면 비판'의 폭주라는 극단적인 반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다가 감독이 트란 안 훙이라길래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악평이 쏟아졌던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보지 못했지만, 그가 주목받았던 <그린파파야 향기, 씨클로>를 떠올리니 과연 <상실의 시대>는 어떤 영상으로 채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일설에 하루키로부터 어렵사리 승낙을 얻었다는 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얻은 결론은?

역시 섣부른 기대와 호기심은 금물입니다. <상실의 시대>는 원작의 내러티브를 거의 탈색시킨 채 트란 안 훙 버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원작의 분량 자체가 많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각색단계에서 상당부분을 삭제시켰습니다. 초반 약 5분 가량을 보면서는 흠칫 놀랐을 정도입니다. 캐릭터 중 일부 - 특히 미도리 - 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됐고, 무엇보다도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복잡미묘한 심리가 모조리 날아갔습니다. 때문에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우중충하기만 했지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캐릭터 몇몇도 함께 삭제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습니다. 굳이 우겨넣을 필요가 없을 만큼 생략이 심합니다.

여러 모로 <상실의 시대>는 트란 안 훙의 전작과 닮았습니다. 카메라는 인물을 집요하게 더듬고 음악은 그 주변을 격정적으로 휘감습니다. '혼돈'의 코드로 그는 원작이 인물에게 부여한 내면심리와 맞닿아있지만 표현방식에서는 사뭇 다릅니다. 하루키가 상처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필체를 쓴다면, 트란 안 훙은 여지없이 까발리고 들쑤시는 연출을 내세웁니다. 일례로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하는 원작에서 묘사하지 않았던 죽음을 <상실의 시대>의 카메라는 보란 듯이 비춥니다. 이처럼 트란 안 훙은 죽음의 비극을 영화에 드리우며 그 무게를 관객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연약하고 가냘픈 이미지의 나오코가 공포영화에 등장할 법한 히스테리 환자로만 보이는 것도 이러한 영향 탓입니다.

원작의 삭제로 비축한 분량을 트란 안 홍은 젊은이들의 비극적이고 원초적인 러브 스토리로 만드는 데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배경이 다 날아간 탓에 영화에 남은 것은 섹스로 빗대어지는 사랑의 고통과 진정성에 대한 의문뿐입니다. 그마저도 근간이 빈약하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산하고 심층적이었던 원작의 정서를 <상실의 시대>는 가급적 단순화시키고자 했습니다. 처음부터 트란 안 훙이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원작을 영화로 전달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결말부는 원작과 동일한 선상에서 마무리하고자 느닷없이 다가오는 듯하여 적잖이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혹시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제대로 먹힐 가능성이 극히 적습니다.

★★☆

덧 1) 영화의 연출보다는 주요 배역의 캐스팅이 더 맘에 안 듭니다. 미도리, 나오코는 정말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덧 2) <상실의 시대>의 리뷰를 이토록 무미건조하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시간도 없지만 할 말은 더욱 없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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