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인베이젼 - 영웅주의로 몰락한 SF ★★★☆

작년에 개봉한 <스카이라인>은 여러모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영화입니다. <스카이라인>은 생애 최초로 미국에서,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일 '그로우만스 차이니즈 시어터'에서 본 영화입니다. (여기에 얽힌 황당한 에피소드도 하나 있는데 차후 미국 여행기에서 밝히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추억을 안겨주긴 했지만, 정작 영화 자체는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허무하기 그지없어서 꽤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영어에 능통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스카이라인>을 관람작으로 택했던 이유가 뭘까요? 바로 SF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비주얼에 중점을 두고 볼 요량이니 대사야 알아듣든 말든 알 바 아니란 판단이었죠.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아니, 정확해도 너무 정확해서 허탈할 정도였어요. <스카이라인>은 기본적인 '이야기'의 뼈대가 참으로 부실했습니다. 단순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어 화면에만 집중해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란 전혀 어렵지 않았죠.

물론 시각효과는 뛰어났습니다. 제작비를 감안하면 거의 경이로울 지경이었죠. 하지만 영화는 광고나 뮤직 비디오와는 달라요. 짧게는 10여 초, 길게는 수 분 내에 영상으로 관람자를 현혹해야 하는 매체와 달리, 두 시간에까지 이르는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는 최소한의 이야기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뮤직 비디오 감독 출신으로 영화를 연출할 경우 - 대표적으로 마이클 베이 -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비판도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겉만 번지르르하다, 내용이 없다"라는 것이죠. 바로 <스카이라인>이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월드 인베이젼>을 기대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미국에서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영화, <스카이라인>을 연출한 스트라우스 형제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월드 인베이젼>도 그들이 연출했다면 결코 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관람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시각효과에만 참여했다는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되면서 <스카이라인>보다 더 큰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월드 인베이젼>의 조나단 리브스만 감독을 믿었다는 건 아니지만, 스트라우스 형제가 연출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죠.

<월드 인베이젼>은 시작부터 빠르게 관객들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외계에서 지구의 각 도시를 침공하여 초토화시키는 광경을 엄청난 스케일로 보여주면서 급속도로 화력전을 펼칩니다. 그 후에야 이야기의 발단으로 이어지죠. 그러니까 <월드 인베이젼>의 오프닝은 '플래쉬 포워드'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이처럼 시간상으로 보면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오프닝에 배치한 데는 분명 단숨에 관객들의 흥미를 사로잡겠다는 의도가 담겼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혹시 전개가 느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편집한 건 아닐까 했는데, 이게 웬걸요? 의외로 아주 시원시원하게 치고 나아갑니다.

앞서 조나단 리브스만은 적어도 스트라우스 형제보단 나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고 했죠? 이번에도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예고편을 보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소개했던 포스트에서 말했다시피, <월드 인베이젼>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러나 모티브가 된 사건, 즉 'Battle of Los Angeles'에서 딱히 '이야기'라고 부를 만한 부분을 가져온 것은 없습니다. 일단 시대적 배경부터가 다르고 현실에서 <월드 인베이젼>처럼 대대적인 외계인의 침공이 있었던 적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월드 인베이젼>에는 나름의, 최소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월드 인베이젼>을 <스카이라인>보다 우위에 둘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월드 인베이젼>은 초반에 각 등장인물에게 저마다의 사연을 부여하는 데 시간을 할애합니다. 주인공인 낸츠 하사는 수차례의 전투에 참여한 베테랑이지만 부대원을 잃은 뼈아픈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과거는 극이 전개될수록 필수적으로 필요한 장치로 활용됩니다. 그 밖에도 낸츠 하사의 부대원으로 참전했다가 죽은 군인의 형제, 결혼을 앞두고 있으나 졸지에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서게 된 남자, 17세의 어린 나이로 군인이 되어 여전히 어리숙한 신병도 이야기를 보탭니다.

이들이 한데 모여 만든 이야기는 눈부신 시각효과만큼이나 <월드 인베이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록 신선하지도 않고 전형적이긴 하지만 관객으로부터 최소한의 감정이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꽤 효과적인 도구로 쓰인 것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은 결국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제조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일단 <스카이라인>보다 등장인물이 많으니 보다 풍성한 이야기를 형성하는 것이 용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월드 인베이젼>의 이야기는 본격 SF 장르가 아니라 전쟁영화의 그것을 닮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는 단점으로도 크게 작용합니다.

이 또한 옛 포스트에서 말했던 바입니다만, 제가 예고편에 홀딱 반했던 것은 <월드 인베이젼>이 외계인의 침공을 다뤘음에도 본격적인 현대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비슷한 소재를 담았던 영화를 보면 으레 지구인이 외계인의 무차별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합니다. <인디펜던스 데이, 우주전쟁, 스카이라인> 등을 봐도 기껏해야 중화기나 전투기, 탱크로 미약하게 대적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월드 인베이젼>도 초반엔 이와 동일하게 시작합니다. 구축함이 격침되고 전투기 또한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도시가 쑥대밭으로 변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월드 인베이젼>의 핵심은 이때부터 새롭게 펼쳐집니다. 낸츠 하사를 비롯한 부대원 몇 명이 시내에 남아있는 민간인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영화는 현대전, 정확히 숨이 막힐 듯한 박진감이 있는 시가전의 형태를 띱니다. 실제로 이들이 시내에 진입하는 초반에는 스릴마저 느껴집니다. 때때로 외계인과 전면전을 벌이는가 하면 매복하고 있던 녀석들에게 당하기도 하면서 관객의 심장을 죄어옵니다. 이처럼 외계인 대 인간이 벌이는 - 전쟁이 아닌 - '전투'는 <월드 인베이젼>을 보는 데 상당한 재미와 신선함을 부여합니다.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면 <월드 인베이젼>은 범작 이상의 영화로 기억됐을 겁니다. 하지만 본격 SF 장르에서 벗어나 전쟁영화의 공식과 클리셰의 폐단마저 고스란히 답습하면서 이 영화는 몰락하고 맙니다. 낸츠 하사를 간혹 전쟁영웅이나 구원자쯤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럭저럭 참을만했습니다. 모름지기 무리에는 훌륭한 리더가 필요하기 마련이고, 이 리더와 구성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드라마가 살아나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이 드라마가 잦고도 노골적인 감상주의를 동반하게 되면, 관객으로서는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기에 뚜렷한 흠이 남아버렸습니다.

<월드 인베이젼>은 분명 <스카이라인>보다는 나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 안에는 드라마도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조금만 절제하고 다듬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적어도 비주얼이 전부인 영화는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디스트릭트 9>이 되지 못할 바에는 <인디펜던스 데이>를 따라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무래도 <월드 인베이젼>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이 외계인과의 전투라는 것을 보면, 차라리 철저히 오락적인 면에 주안점을 뒀다면 보다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었을 듯합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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