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개봉한 <스카이라인>은 여러모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영화입니다. <스카이라인>은 생애 최초로 미국에서,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일 '그로우만스 차이니즈 시어터'에서 본 영화입니다. (여기에 얽힌 황당한 에피소드도 하나 있는데 차후 미국 여행기에서 밝히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추억을 안겨주긴 했지만, 정작 영화 자체는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허무하기 그지없어서 꽤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영어에 능통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스카이라인>을 관람작으로 택했던 이유가 뭘까요? 바로 SF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비주얼에 중점을 두고 볼 요량이니 대사야 알아듣든 말든 알 바 아니란 판단이었죠.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아니, 정확해도 너무 정확해서 허탈할 정도였어요. <스카이라인>은 기본적인 '이야기'의 뼈대가 참으로 부실했습니다. 단순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어 화면에만 집중해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란 전혀 어렵지 않았죠.
물론 시각효과는 뛰어났습니다. 제작비를 감안하면 거의 경이로울 지경이었죠. 하지만 영화는 광고나 뮤직 비디오와는 달라요. 짧게는 10여 초, 길게는 수 분 내에 영상으로 관람자를 현혹해야 하는 매체와 달리, 두 시간에까지 이르는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는 최소한의 이야기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뮤직 비디오 감독 출신으로 영화를 연출할 경우 - 대표적으로 마이클 베이 -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비판도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겉만 번지르르하다, 내용이 없다"라는 것이죠. 바로 <스카이라인>이 그랬습니다.
<월드 인베이젼>은 시작부터 빠르게 관객들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외계에서 지구의 각 도시를 침공하여 초토화시키는 광경을 엄청난 스케일로 보여주면서 급속도로 화력전을 펼칩니다. 그 후에야 이야기의 발단으로 이어지죠. 그러니까 <월드 인베이젼>의 오프닝은 '플래쉬 포워드'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이처럼 시간상으로 보면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오프닝에 배치한 데는 분명 단숨에 관객들의 흥미를 사로잡겠다는 의도가 담겼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혹시 전개가 느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편집한 건 아닐까 했는데, 이게 웬걸요? 의외로 아주 시원시원하게 치고 나아갑니다.
앞서 조나단 리브스만은 적어도 스트라우스 형제보단 나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고 했죠? 이번에도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예고편을 보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소개했던 포스트에서 말했다시피, <월드 인베이젼>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러나 모티브가 된 사건, 즉 'Battle of Los Angeles'에서 딱히 '이야기'라고 부를 만한 부분을 가져온 것은 없습니다. 일단 시대적 배경부터가 다르고 현실에서 <월드 인베이젼>처럼 대대적인 외계인의 침공이 있었던 적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월드 인베이젼>에는 나름의, 최소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이 한데 모여 만든 이야기는 눈부신 시각효과만큼이나 <월드 인베이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록 신선하지도 않고 전형적이긴 하지만 관객으로부터 최소한의 감정이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꽤 효과적인 도구로 쓰인 것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은 결국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제조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일단 <스카이라인>보다 등장인물이 많으니 보다 풍성한 이야기를 형성하는 것이 용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월드 인베이젼>의 이야기는 본격 SF 장르가 아니라 전쟁영화의 그것을 닮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는 단점으로도 크게 작용합니다.
이 또한 옛 포스트에서 말했던 바입니다만, 제가 예고편에 홀딱 반했던 것은 <월드 인베이젼>이 외계인의 침공을 다뤘음에도 본격적인 현대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비슷한 소재를 담았던 영화를 보면 으레 지구인이 외계인의 무차별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합니다. <인디펜던스 데이, 우주전쟁, 스카이라인> 등을 봐도 기껏해야 중화기나 전투기, 탱크로 미약하게 대적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월드 인베이젼>도 초반엔 이와 동일하게 시작합니다. 구축함이 격침되고 전투기 또한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도시가 쑥대밭으로 변합니다.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면 <월드 인베이젼>은 범작 이상의 영화로 기억됐을 겁니다. 하지만 본격 SF 장르에서 벗어나 전쟁영화의 공식과 클리셰의 폐단마저 고스란히 답습하면서 이 영화는 몰락하고 맙니다. 낸츠 하사를 간혹 전쟁영웅이나 구원자쯤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럭저럭 참을만했습니다. 모름지기 무리에는 훌륭한 리더가 필요하기 마련이고, 이 리더와 구성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드라마가 살아나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이 드라마가 잦고도 노골적인 감상주의를 동반하게 되면, 관객으로서는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기에 뚜렷한 흠이 남아버렸습니다.
<월드 인베이젼>은 분명 <스카이라인>보다는 나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 안에는 드라마도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조금만 절제하고 다듬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적어도 비주얼이 전부인 영화는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디스트릭트 9>이 되지 못할 바에는 <인디펜던스 데이>를 따라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무래도 <월드 인베이젼>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이 외계인과의 전투라는 것을 보면, 차라리 철저히 오락적인 면에 주안점을 뒀다면 보다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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