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우리’의 실존을 바탕으로 1기 방통위를 평가한 좋은 발제문이 나왔다. 김동원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1팀장의 글.

좋으나 싫으나 한국사회의 중요한 공공영역에 위치하여, 미디어 공공영역의 양질을 좌지우지하는 방송정책주무기관 방통위이다. 김동원은 무엇보다 1기 방통위 3년을 평가하되 위치, 시선,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2기 방통위가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글쓴이의 위치는 “2011년 오늘 한국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이 도처에 번져나가고 있다”는 죽음의 현장에 있다.

글쓴이의 시선은 “1987년 6월에 거리에 나온 시민들의 요구와 2008년 촛불시위 대 터져 나온 시민들의 요구는 분명히 달랐으며, 2010년 연평도 사태와 구제역 파동은 ‘전면적인 삶의 위기’에 처한 시민(다중)의 요구가 임박하고 있음”에 머물러 있다.

▲ 3월 10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열린 '1기 방통위 평가와 향후 과제' 토론회에서 공공미디어연구소 김동원 연구원이 발제를 하고 있다ⓒ권순택
글쓴이의 지향은 정치적, 제도적 대안의 구상과 함께 “2008년 그 얼굴을 드러낸 다중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그 요구를 관철시킬 것인가”에 두고 있다. 글쓴이의 위치, 시선, 지향이 이러하다면 눈치가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시민(다중) 없이 오직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입지만을 강화시키며 방송장악에 나선 공공성 배신의 3년”이라는 평가가 나오리라 직감할 테다.

글쓴이는 공공성을 접근함에 있어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들이 동시에 겪는 위험과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에 의한 말하기/사고하기의 방식이자 그 장”이라는 빠올로 비르노의 초식을 사용했다. 2008년 촛불에서의 다중과 2010년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들이 동시에 겪는 위험과 공포”에 초점을 맞추고 공공영역으로서의 방통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살펴낸다.

여기서 다중-대중, 다중-시민-민중의 해묵은 논쟁을 재론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비르노에 의하면 다중은 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국가를 구축하는 정치가 아니라 다원적인 경험들을 통해 비-대의제적 민주주의의 형태들을 추구한다. 이때 지성의 공적 영역에서 행동하는 소수의 총체로 등장하며, 누구도 자신을 다수로 변형시키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다중은 정치적 대의체제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을 방해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국가지성으로 자리잡아 행정장치 속에 응고되어 있는 일반지성을 전유하고 재분절한다. 글쓴이는 비르노 초식을 사용함에 따라 국민, 수용자, 이용자 같은 말은 존재에 대한 수동적 개념이라고 일갈한다. ‘미디어 수용자운동’, ‘미디어 컨텐츠 이용자’처럼 일반적으로 호명하는 관습과 일정한 충돌이 예상되지만 이 역시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다.

개념 논란을 떠나, 요즘 세태에 미디어 연구자로써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들이 동시에 겪는 위험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민들”에 주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공공영역의 양질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통위에 대해 3년을 통으로 놓고 이같이 접근하는 것 자체로 유쾌한 일이다. 이같은 접근은 작금의 방통위한테 상당한 긴장을 유발할 테다. 가령 미디어 공공성 논의에서 익숙한 프레임인 “공익주의/시장주의” “아날로그/디지털”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개념쌍에 있어서는 시민사회가 수동적으로 위치지어진다. 글쓴이는 실제 ‘KBS 2010년 주요 공척책무 수행실적 및 공적책무 확대방안’과 ‘2010년 방통위 연차보고서의 이용자(시청자) 항목’을 열거한 후 “여기서는 보호받아야 할 이용자, 장애인과 빈곤층과 같은 소외계층 기술적 혜택(난시청 해소)을 받아야 할 오지 주민, 도덕적이고 올바른 미디어 이용을 위한 피교육자만이 등장할 뿐”이라고 평가한다. KBS와 방통위가 열거한 내용에 “위기 탈출의 역동적 요구를 펼치는 시민(다중)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공공영역으로부터 박탈된 이들, 타자의 존재가 사라진 장소를 박탈당한 사람들, 타자의 응답 가능성을 상실한 사람들을 아렌트는 ‘·버려짐’으로 호명했다. 공공적 공간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사회의 항쟁은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을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와는 관계가 없다. 문제는 단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현실적인 존재인가에 있다. 사회가 추방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현재 주고 있는 최대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현실성과 존재의의를 의심하게 하여, 그를 그 자신이 보아도 비실재의 위치로 환원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인문과학과 사회학, 도시(국가) 계획과 건축학의 핵심에 20세기의 거대 전체주의 국가들의 생명정치를 규정하는 ‘벌거벗은 생명’이 한결같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채 오늘날 전 세계 도시들의 공적 공간을 사유하고 조직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델들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적대적인 표현도 마다 않았다.

참여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들이 동시에 겪는 위험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민들”은 스스로 위기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 전 부문에 걸쳐 경쟁과 효율을 근간으로 하는 법체제가 도입되고, 법체제의 안착과 함께 사적 소유를 절대시하는 사회체제가 형성됐다. 사회구성원 개인들은 경쟁력이나 스펙을 갖추지 않으면 공공영역에서 박탈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을 체득하는 가운데 사회체제를 받아들였다. 혹은 박탈 즉 버려졌다.

글쓴이는 방통위 1기의 정책을 평가함에 있어 공공영역의 시민(다중)은 통제하고, 버려지는 시민(다중)은 방관했다고 요약했다. 여유 대역대 뿐 아니라 지상파방송사로부터 회수할 700MHz에 대한 주파수 경매제는 주파수 재개발 정책으로, 시민(다중)의 존재는 사라지고, 사업자의 이윤을 창출해줄 소비자만 남는다고 지적했다. 케이블사업자의 디지털 전환은 시청자의 방송플랫폼 선택권을 무시하는 불공정 경쟁으로 치닫도록 했고, 케이블의 지상파 재송신 관련 분쟁에 있어 시청권 보장은 살피지 않고 사업자들의 이해관계 조정에만 초점을 두었다고 짚었다. 아울러 자유로운 투자활동 보장을 위한 2008년 방송법 시행령 개정, 지상파 및 MPP 계열 편성제한 해소, 2008년 결합상품 요금인가에 있어 소비자 보호를 빙자한 규제완화 등의 문제도 줄곧 시민(다중)을 중심에 놓고 평가했다. 종편 도입이야 말 할 것도 없고.

그러하니 2기 방통위는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들이 동시에 겪는 위험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민들”한테로 시선을 향해야 한다. 야당 상임위원 만이라도 어떻게든 기를 쓰고 노력할 일이다. 우선 김동원의 이 글부터 숙독하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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