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에 대한 국내의 반발은 우려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사태의 본질을 감추는 민족주의적 편향에 정치와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면서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한 논리에는 눈을 감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이번 사태를 보는 국내 언론의 논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 정부가 취한 조치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지면에도 몇 차례 썼듯 일본의 최근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는 여러 측면에서 무리한 면이 있는 만큼 언론이 이런 지적을 내놓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둘째는 국내 대기업이 반도체 소재 및 핵심 부품의 국산화에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번 일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계기로 삼으라는 주문을 내놓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통해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논리가 포함된다. 이런 주장은 정부 여당과 사태를 보는 인식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판단해봐야 할 것은 대기업이 소재 등의 국산화를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 논조를 가진 신문들은 이런 상황의 이유를 대기업의 어떤 능력 부족이나 박약한 의지 등에서 찾고 있지만 보수언론의 진단은 다르다. 대기업이 아니라 규제의 문제라는 거다. 이게 이번 사태를 다루는 언론의 세 번째 논조이다.

대기업이 특정 국가 편향을 벗어나기 위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30대 대기업 총수 및 CEO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도 제기됐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나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등 때문에 반도체 소재 개발 등에 필요한 화학 물질의 개발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현재의 화관법은 구미 불산 누출 사고를, 화평법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산안법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 씨의 사례를 통해 지난해 강화됐다. 보수언론 역시 이런 법안들이 유럽보다 엄격한 규제를 담고 있어 대기업들에 부담이 되고 있기 때문에 법안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 정부와 집권 세력이 이러한 논리 때문에 국민안전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법안 개정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의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 자체를 되짚어봐야 할 필요는 있다.

일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비판 논리는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자유무역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국제적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무역이란 각국이 세계적 분업 구조 속에서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무역의 방식으로 상호호혜적인 경제 체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보복 조치는 이러한 이상에 반하는 것이란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는 반도체 소재와 핵심 부품의 국산화가 지금과 같은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논리와 큰 방향에 있어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인식의 균열은 각국이 국제적 분업과 상품 공급 사슬에 적응하느라 자국의 산업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로 인한 부담을 최종적으로 노동자들에 떠넘겼다는 사실을 외면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보수언론의 논조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난다. 보수언론은 소재와 부품은 일본을 통해 조달하고 대신 제조기술과 대량생산을 통한 가격경쟁력 확보에 집중한 것이 삼성을 필두로 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생존 비결이었다고 주장한다. 자유무역주의의 장점을 영리하게 효율적으로 이용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이런방식으로 세계시장에 ‘효율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8일 대구 시내 한 마트 진열대에 일본 제품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이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비판 논리는 보수세력에게 어느 나라의 편인지를 묻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보수세력이 한국 정부의 외교 실패를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사실 일본의 편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보수적 정치인의 주장이나 보수언론의 보도가 일본이 한국을 공격하는 데 이용당하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런 인식을 따르자면 보수세력이 특별히 일본을 편드는 이유가 설명이 돼야 한다. 보수세력과 대기업을 친일기득권이라는 규정으로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적 대립 구도가 여기에 동원된다. 친미보수니 친일보수니 하는 개념을 논하는 칼럼 등은 이의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이런 규정에 일말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수세력이 정권을 비판하는 보다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의 보복 조치가 대기업에 위협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봐야 한다. 보수세력의 시각으로 보면 문재인 정권과 일본의 보복 조치는 국내 대기업에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같은 편에 서있다. 보수언론은 이런 차원에서 대기업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아베 신조 정권의 무역 보복이 어디서 왔는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전문가들은 아베 신조 내각의 개헌 로드맵이나 남북관계 개선 및 북미 간 비핵화 협상 등으로 동아시아 안보 구도가 변화한 것 등을 주로 언급한다. 물론 이런 분석에 일리가 있다. 그런데 한국 사법부의 판결이 일본 기업에 구체적 피해를 안긴다는 사실 역시 아베 신조 내각의 행보를 가능케 하는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동력은 군국주의와 결합한 자본의 팽창욕구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강제징용 피해는 이 맥락에서 발생했다. 국가총동원체제를 통해 정치와 경제가 표리일체가 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강제연행을 실시했고 자본은 피해자들의 강제노역으로 이익을 거두었다.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바로 이 상황에 대한 정의를 뒤늦게나마 실현하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와 기업이 하나가 되어 일본의 부당한 공세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당의 주요 정치인이나 일부 논자들이 일본에 대한 국민적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방식으로 사안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문제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이해득실의 정치가 아니라 문제의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는 시도를 반복해야 한다. 언론도 민족주의적 반발에 편승하면서 영웅이 되려는 노력보다는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는 냉철함을 갖추려는 노력을 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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