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문순 의원실과 미디어행동 주최로 5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언론 4대강, 종편 규탄' 토론회에서 김성균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대표 등 참석자들이 방통위의 종편 사업자 선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 남소연 오마이뉴스
공공의 세계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고 공적 공간이 확보되어 있지도 않았던, 18세기 계몽적 절대주의의 지배 하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숨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토크빌)이라는 자유의 정념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망은 ‘공적 자유’를 의미했다. 공적 자유란 사람들이 세계의 압력으로부터 마음대로 도피하려는 내적 영역이 아니며, 의지로 하여금 양자 중에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유로운 선택도 아니었다. 특정한 개인의 자유(liberties)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 영역(public realm)의 확보로부터 개인의 자유도 쟁취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시민들은 ‘공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다양한 방식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경험했다. 이 혁명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과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려는 투쟁이라는 두 개의 결이 확인되는데, 이는 동시에 진행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상이한 정치 행위였다. 정치혁명 또는 사회혁명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사회적 상황과 참여자들의 동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했고.

이때 격렬하지만 정치적으로 단조롭고 열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증오라고 하는데, 억압받는 사람들의 증오는 해방에 대한 갈망으로 쉽게 왜곡되곤 했다. 어쩌면 증오는 기록된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증오는 혁명을 초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증오는 자유의 확립, 즉 자유가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해줄 정치체의 형성이라는 혁명의 핵심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를 수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아렌트의 ‘혁명론’에 나오는 이야기니 참조하시고.

근대 공공영역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시민의 투쟁의 결과이며, 누군가에 의해 저절로 주어진 것은 없었다. 한때 먹물들이 회자하기 좋아했던 87년체제 역시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며, 민주화 투쟁의 성과만큼의 정치적 자유가 보장됐고, 또 그만한 공공영역이 주어졌다. KBS 민주화투쟁도, MBC 단협 쟁취도 매한가지로 풀이된다. 이 같은 공공영역에 시장주의의 침투가 본격화되고, 시나브로 세상이 시장주의의 지배력 하에 좌지우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적 자유는 획기적으로 축소되었다. 시장의 규율에 따라 공공영역이 재편되었고, 공공영역에서 누릴 수 있는 정치적 자유는 시장의 지배력에 반비례로 제한되었다. 물론 역동적인 현재진행형이다. “말하고 행동하며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을 누리려는 시민들은 말과 행동을(이) 억제(당)하고, 숨이 가빠지는 현실과 조우하며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시장을 매개로,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즐거움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으며, 정치적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민의 저항은 산발적이었고 지금까지 후퇴를 거듭해왔다.

미디어에 있어 대의제미디어(공영방송)는 공공영역을 확보하고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대의해왔다. 공정성과 균형감이라는, 비록 기계적 중립의 형식적 틀의 한계조차 미덕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까지 대의제미디어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공론장 기능을 담지해왔다. 대의제미디어 종사자들은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치권력은 공공영역으로서의 대의제미디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고, 방송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 등 방송정책 주무기관은 유료방송 중심의 규제/진흥 정책에 휩쓸렸고, 방송의 공적인 것에 아무런 철학도 없는 자본가들은 지주회사를 도입하거나 유료방송 사업자로 변모하여 이윤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다. 종편채널사업자 4개와 보도전문채널사업자 1개가 허용됨으로써 이제 미디어에 있어 공공영역은 양적인 면만으로도 볼품없는 모양이 되었다. 대의제미디어 종사자들의 일부가 악착같이 언론의 독립과 자유에 관심을 기울일 뿐인지라, 공영방송 안팎의 비상의 수단이 없다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분위기다. 현재 가장 심하게 노출된 미디어의 공공영역은 공영방송 MBC이며, 칼날은 정확히 MBC의 공영성(소유지배구조와 단체협약)을 지키려는 구성원들을 향해 있다.

이명박정권을 증오하는 시민들의 표현과 몸짓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격렬하지만 정치적으로 단조롭고 열정적인 시민들의 갈망을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울러 시민들의 증오에 편승하는 이른바 운동권들의 정치적 기획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즈음 시장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과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려는 투쟁이라는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구상이란! 그리고 공공영역의 방어와 확장을 위한 내밀한 정치적 기획없이 정치적 자유를 기대하는 것의 미숙함이란! 증오의 정치에 편승하여 근거 설명없이 낙관을 유포하거나, 단지 투표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거라는 신념을 확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제발 좀 돌아보는!

4대강을 반대하는 세력이 승리할 거라는 정의를 믿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부나 한나라당이 4대강이 완성되면 지지를 얻을 것이라는 정의도 믿을 수 없다. 전자는 엠비정권이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하기에, 그 대표적인 것이 4대강이기에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후자는 강행 통과시킨 예산을 4대강을 중심으로 풀어놓은 만큼 시간이 지나면 돈의 위력이 나타날 거라고 설명한다. 둘 중 하나가 맞고 하나가 틀리겠지만 현재로서는 둘 다 미신이다.

종편도 그러하다. 신규사업자 5개가 진출함으로써 5개가 다 망할 것이고, 미디어 생태계를 유린한 정치적 기획은 파산할 거라는 사필귀정론을 믿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올 가을부터 종편이 방송되고 지상파방송을 좌지우지하면 2012년에 장기집권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의도 믿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둘 중 하나는 맞겠지만 현재로서는 둘 다 미신이다. 종편사업자 4개중 몇 개가 경쟁하다 도태될 수 있겠지만, 설령 다 망할 수도 있겠지만, 규제가 아니라 경쟁의 결과라면 공공영역의 후퇴는 복구하기 힘들게 된다. 공영방송이 이 경쟁에 휩쓸려버리면 지상파방송과 종편의 칸막이는 없어진다. 정병국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다. 요게 핵심이다.

조중동매연에 대한 증오는 격렬하지만 정치적으로 단조롭고 열정적이다. 조중동 종편을 저지하기 위한 지난 2년간의 실천 과정에서 언론들이 지금처럼 격렬하게 반응했던 때는 없었다. 일각에서 조중동매연과 반조중동매연의 대립이 생긴 것처럼, 혹은 기대감을 유포하는 것은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단언컨대 종편을 무효, 해체하는 것이 정치적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부득이하다면 방송 시작 시기를 지체,지연시켜야 하며, 최후에는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물고늘어져야 한다. 지금 특혜와 비대칭규제를 문제삼는 것이 공공영역(정치적 자유)을 유린하는 종편을 거세하는 목적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요구하는 것이 되는 한, 지상파방송이 민영미디어렙과 수신료 현실화에 기대어 생존과 경쟁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려는 한, 조중동매연과 반조중동매연이 갖는 의미는 눈곱만큼도 없다.

덧붙여 연합뉴스 문제에 대해 한마디만. 연합뉴스TV에 컨소시엄으로 참여한 을지병원과 을지학원이 현행법을 위반했는지 논란이다. 논란이야 토론해서 정리하면 된다. 그런데 이 논란의 귀결이 단지 의료법이나 민법 등 현행법을 위반했느냐 여부로 제한되는 건 곤란하다. 5일 토론회에서 연합뉴스 기자는 자문 변호사와 복지부의 입장을 들어 이미 한 대형병원이 코스닥 투자를 하고 학교법인이 대학발전기금을 펀드로 운용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이라면 공공영역인 의료와 교육에도 시장주의가 진입했다는 이야기다. 만에 하나, 설마, 그리하여 논란의 결과로서, 을지병원과 을지학원이 보도전문채널의 대주주가 되어도 문제없다는 결론이 난다 치자. 그렇다면 연합뉴스는 국가기간뉴스통신사 지위는 내놓는 게 맞겠지. 350억원에 이르는 정부보조금도 반환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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