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 한 해를 돌아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흔히들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고 한다. 미디어스는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돌아보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다. 2010년의 한복판에 섰던 사람들은 많았다. 가리고 추려 사람들을 골랐다. 한 해를 달궜던 사람들의 삶은 사회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일관된 하나의 주제가 개입되지는 않았다. 떠오르는 대로 성심껏 가리고 추렸다. 한 해 미디어스가 세상과 조우했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한 해를 정리하고 평가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몫이다. 하지만 평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편애가 필요하다.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 그게 핵심이다.

국제부, 사회부, 정치부 기자 생활을 거쳐 KBS <뉴스타임> 앵커를 지낸 중견기자에서 'KBS 새 노조 위원장'으로.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만난 엄경철 위원장에게 "올 한해 어땠느냐?"고 묻자 "그야말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한해였던 것 같다"고 답하며 웃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계기와 상황으로 노조 위원장이 되었는데, 올 한해…솔직히 너무나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다시는 제 인생에서 이렇게 드라마틱한 한해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 뜨거웠던 지난 7월, 서울 여의도 KBS 앞에서 진행된 'KBS 개념탑재의 밤' 행사에 참석한 엄경철 위원장의 모습. ⓒ미디어스
2010년 언론계에 새로운 'KBS의 희망'으로 등장한 'KBS 새 노조'(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엄 위원장. 언론노조 KBS본부 준비위를 꾸리고(2009년 12월), 정식으로 출범식을 열고(3월),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총파업(7월)을 진행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솔직히 이게 될까…?"하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새 노조는 각종 난관을 뚫고 12월 초, 마침내 KBS 사측과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우리는 단협도 못 맺고, 장외에서만 싸우다가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 길이 열리더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엄 위원장. "주저앉는 자에게는 기회가 없고, 두드리고 깨지면서 결국 길이 열린다는 것을 올해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은 제가 이런 예민한 시기에,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자리를 맡을만한 과거를 갖고 있지 않아요. 잠깐 앵커를 했을 뿐이고, 평범한 기자생활을 해왔었죠.

2008년 8월 KBS가 권력에 의해 접수된 이후 KBS에서 온갖 비상식적인 일들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이건 도저히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본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나설 때 오히려 큰 울림이 있다는 생각이 KBS 내에서 공유됐던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온건하다고 꼽혔던 '엄 기자'가 '엄 위원장'이라는 호칭으로 '투쟁'의 최전선에 서게 된 것은 그만큼 공영방송사 KBS에게 닥친 위기가 위중했다는 뜻이다.

"(노조 위원장을 맡겠다고 하니) 집에서 강력히 반대했었어요. 지금은 자포자기했죠. 하하.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이 있는데, (저와 관련된) 신문기사를 보고 자주 물어봐요. '아빠 노동조합이 뭐야? 아빠는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아빠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는거지?'라고. 아마 녀석도 해고, 징계 이런 단어들을 신문에서 봤을 테니 걱정이 되어서 묻는 것 같아요."

'파란만장 했던 올해,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느냐?'고 묻자 엄 위원장은 한번 크게 웃은 뒤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갔다.

"노조 위원장이라는 공적 자리로 인해 제가 했던 주장, 외침, 요구들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떤 사람과 대치하고 얼굴을 붉히는 게 참 힘들었어요. 파업보다 더. 솔직히 저는 사람들과 모나게 지내는 걸 체질적으로 잘 못 견뎌요. 제 마음이 불편하니까 먼저 사과하고 마는데, 노조 위원장직을 맡다보니 그렇게 할 수가 없는거죠.

(청와대 외압의 정황증거인) 정보보고 문건 공개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보고문건을 작성한) 해당 기자에게는 (공개의) 정당성을 떠나 큰 상처일 것이기 때문에 (위원장 직을 떠나) 개인적으로는 편치 않습니다. 공개한 당일, 해당 기자한테서 전화가 왔더라구요. 이름이 입력 안돼 있어서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이더군요. 아직은 통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고, 당사자도 그렇고….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한 뒤에 현명하게 대화할 시간이 앞으로 있겠죠."

"KBS, 참여정부 시절 '정부 비판매체' 2등 했었다"

연평도 포격보도, 예산안 날치기 등 KBS보도의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엄 위원장이 생각하는 '최악의 KBS보도'는 무엇일까?

엄 위원장은 '최악의 보도'보다는 '최악의 침묵'을 꼽고 싶다며 "4대강 사업"을 지적했다.

"편파보도도 문제지만 의도적 침묵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4대강 사업이 KBS 전파를 탄 게 언제인지…가물가물하네요. KBS는 서울시의 무상급식 문제도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죠. 침묵하는 사안이 너무 많아요.

사측은 '참여정부 때는 보수진영에서 편파적이라고 문제삼았고, 지금은 진보진영에서 비판한다'며 자꾸 문제의 본질을 가리려 하는데, 정연주 사장 시절에는 보도에 있어서 민감한 사안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죠. 예전에 보수단체가 단순히 '인상비평'만으로 KBS보도의 편향성을 문제삼았던 것과 현재의 상황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순 없다고 봅니다.

데이터를 놓고 이야기해보죠. 2007년 3월 한국홍보학회가 주최한 '참여정부의 정부-언론 관계에 대한 특별세미나'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2002~2005년까지 정부에 대한 부정적 기사 비율이 높은 매체 1위가 동아일보, 2위가 KBS였습니다. (KBS가 참여정부에 편향적이라는 보수단체의 주장과 달리) 청와대 비판 보도를 굉장히 많이 했었어요. 당시에는 사실 '성역'이란 게 없었으니까요. 대단한 후퇴입니다."

(당시 세미나에서 조정열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는 2002~2005년까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매일경제 오마이뉴스 KBS MBC SBS 등 9개 매체의 주요뉴스 12만 6263건을 분석한 결과, 정부에 대한 부정적 뉴스 빈도가 가장 높은 매체는 동아일보(49.9%)였으며, KBS(46.9%)가 그 뒤를 이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KBS노동조합(위원장 강동구)의 '김인규 사장 퇴진 총파업 찬반투표'가 부결된 이후 진통 끝에 탄생한 KBS 새 노조. KBS노동조합과의 '통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최재훈 KBS노동조합 위원장 당선자는 <PD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통합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과정을 밟아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엄 위원장은 "작년 12월 총파업 투표 부결 이후 KBS노조 집행부가 책임있는 자세를 보였다면 새 노조가 생겨났겠느냐. 그 과정에서 최재훈 당시 부위원장(차기 위원장 당선자)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묻고 싶다"며 "그와 관련해서 최재훈 당선자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진정성을 보일 것인지 대안을 제시해야 (통합을 위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에도, 'KBS 개념탑재' 문화제 놀러오세요"

▲ KBS파업 당시 개최된 '개념탑재의 밤'에서 KBS 라디오PD들로 구성된 '파업 장기화와 몰골들'이 '외톨이야'를 개사한 '투쟁이야' 등의 노래을 부르고 있는 모습 ⓒ미디어스
엄 위원장의 임기는 내년 말까지다. 내년도 목표를 묻자 엄 위원장은 "할 게 많다"며 △지난 2년 반 동안 폐지됐던 비판적 시사프로 부활 △6월 조직개편 문제점 시정 △개념탐재 문화제 정기 개최 등 각종 계획을 들려주었다.

"비판적 시사프로를 복원시키기 위해 내부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제작자율성 설문조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현재, 여론조사 기관 선정을 완료했구요. 1월쯤 기자회견을 통해 결과가 발표될 겁니다. '게이트키핑'이라는 이름으로 기자, PD들을 얼마만큼 통제하고 억압했는지 고발함으로써 제작자율성을 확보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파업 도중에 '개념탐재 문화제'를 열었던 것처럼, 공영방송의 정신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문화제를 주기적으로 개최할 생각이에요. 또, 노동운동가나 언론운동가를 초빙해서 조합원 교육도 치밀하게 해보려고 합니다. 공영방송에 대한 구성원들의 사수의지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지난 2년 반 동안 KBS가 쉽게 무너졌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참, 한가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저희 조합원들의 복지를 위해서도 노력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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