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수신료 인상반대 서명용지가 켜켜이 쌓여있다. 서명전은 명동성당 등 전국 각지에서 153일간 진행됐다. 평일은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주말에는 서너시간씩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루에 적게는 300명, 많게는 800명이 서명했다. 얼추 5만명 이상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윽고 11월19일 KBS 이사회가 3,500원 인상안을 결정하던 날, 100일행동은 명동성당 앞 서명전을 접었다. 이제 이 5만장의 서명용지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방통위가 서류를 간추릴 때면 방통위에, 국회가 수신료 인상안을 다룰 때면 국회에 전달될 예정이다.

5만명 이상의 수신료 인상 반대 서명용지
출근할 때마다 사무실에 쌓여있는 서명지 뭉치가 전해오는 무언의 메시지가 있더라. 이후 방통위와 국회에 전달하는 것만으로 서명에 참여한 5만명의 데모스(인민)의 조합적 의지를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 5만명의 서명지를 행정적으로 처리해야할 활동가의 입장일 뿐이지만, 덮어두고 해를 넘기자니 여간 찜찜하지가 않더구만. 그래서 감히 ‘5만명의 시민에게’라는 제목으로 짧은 소감을 남겨두기로 했다.

전나무 묘목이 자라는 걸 보자. 주위에 잡초가 없으면 골고루 충실하게 자란다. 가지는 줄기에서 곧게 뻗어있으며, 잎이 풍성하고 수액도 많다. 이때 식물은 건강하며 발육도 자유롭다. 그러나 전나무 묘목이 잡초가 우거진 곳에 놓인다면, 그 묘목은 잡초에 둘러싸여 잎도 없는 구부러진 줄기로 자라게 된다. 그 줄기는 충분한 가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잎은 오그라들거나 나지 않는다. 잡초는 식물이 기형적으로 자라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식물은 태양을 보기 위해 대단한 싸움을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뒤틀리게 된다. 잡초가 없는 땅에 떨어진 새로운 씨앗들은 모두 처음부터 자유롭고 풍성하게 성장한다.

사회의 자유로운 발달을 전나무 묘목의 발달에 비유하여 빌헬름 라이히가 한 이야기다. 독재 사회는 잡초에 둘러싸인 줄기이며, 독재자의 압력 아래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자신의 길을 가려는 투쟁을 함에도 불구하고 생장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뒤틀려진 줄기로 비유된다. 그는 현재 시점(독일 파시즘)에서 사회 안이나 밖에서의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상황의 영향력으로 인한 왜곡 없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자기조절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파시즘에 대해 권위적인 기계문명과 이 문명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생관의 억압을 받은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감정적 태도로 이해했다. 말하자면 특정 시대 인간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파시스트당을 만든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식이다. 파시스트 정권, 파시스트 당 자체에 주목하지 않고 어떻게 파시즘화 되는가를 당대 인간성격과 인민대중의 자유의 실현 차원에서 분석했다.

빌헬름 라이히의 이론에 대한 승인 여부를 떠나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왜곡 없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자기조절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고 하자. 답변은 여간 곤란하지 않을 테다.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상황과 그 영향력은 사회 발전을 왜곡하고, 자연스럽지 않고, 억압적이며, 기계적인 방식으로 일그러뜨리고 있다는 진단을 피하기 어려울 테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수신료 인상 반대에 서명한 데모스의 의지는 어떠할까. 5만명의 서명자 중에는 단지 가계 경제 차원에서 반대하는 시민부터 방송장악 시비나 공영방송의 개혁 없이 인상할 수 없다는 시민까지 다양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궁극적으로 인상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의지였다. 수신료 서명에 반대한 데모스의 의지가 곧 빌헬름 라이히가 말하는 사회의 자유로운 발달과 등치되는 건 물론 아니다.(그의 성경제학적 사회학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성경제학의 어머니는 정신분석학이고, 아버지는 사회학이다.) 그러나 데모스의 의지가 올곧게 실현되는가 여부는 사회의 자유로운 발달과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그의 생각은 이러하다.

1. 인민대중들은 자유로워질 능력이 없다.
2.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전반적인 능력은 삶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는 매일매일의 투쟁 속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3. 따라서 현재 자유로워질 능력이 없는 인민대중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자유를 확립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회적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

어떠한 대의와 명분을 거론하든, 삶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는 데모스의 매일매일의 투쟁과 그 성과가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수신료 3,500원을 결정한 이들은 대의와 명분, 실리를 나열하기 전에 누구를 슬프게 하였는지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수신료 문제만 놓고 볼 때 궁극적으로 사회적 권력의 주체가 될 이들은 서명을 조직한 이들과 5만명의 서명자이다. ‘뒤틀려진 줄기’로 표현된, 형식적 민주주의 안으로 이끌어 대의.대체하려는 사려깊지 않은 시도가 데모스의 자유의 확립의 지난한 과정에 어떠한 혼동을 주는 지에 대해서도 겸허히 돌아볼 일이다. 수신료 인상 반대 5만장의 서명지들이 속절없이 얄궂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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