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이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도피의 메커니즘에서 권위주의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를 말한 바 있다. 촘스키는 이에 대칭되는 용어로 ‘구경꾼 민주주의’(spectator democracy)를 제시했다. 참여민주주의는 시민이 일정한 수단을 통해 자발적으로 문제 해결에 참여하고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사회로서의 민주주의이고, 구경꾼 민주주의는 시민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참여하지 말아야 하고 소수가 정보 제공을 엄격히 통제하는 사회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촘스키는 전문계급으로서의 시민계급과 이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시민들을 우왕좌왕하는 소떼들의 민주주의로 비유했다. 전문계급으로서의 시민계급 즉 엘리트계급은 민주주의의 집행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들의 공동이익에 대한 사고와 판단, 계획을 수립한다. 우왕좌왕하는 소떼들 역시 민주주의의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다만 적극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에 머무르게 된다. 참여는 단지 그들이 갖는 권리를 엘리트계급 구성원들에게 위임하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며, 민주적인 위임 절차가 끝나면 곧장 뒷전으로 물러나 구경꾼의 지위에 처하게 된다.

▲ MBC 방송강령. 두번째에서 다섯번째 문장을 읽으면서 부끄럽다고 했다.
지난 7월, 언론악법 날치기 1년 토론회에서 이같은 참여민주주의와 구경꾼 민주주의를 들어 언론인의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논한 바 있다. 87년 이후 엘리트계급으로서의 언론인과 언론사회의 궤적은 수구냉전언론, 친자본언론을 통한 특권층으로의 안착, 또는 언론자유와 독립성, 미디어공공성 실천의 축적 속에서 평가된다. 신자유주의 이념과 정책이 정치.경제.사회 발전의 지배적 경향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엘리트계급으로서의 언론인의 입지는 축소되고, 자발적이고 체제친화적인 언론인의 입지는 확대되어왔다. 이에 따라 참여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저널리즘은 약화되고 구경꾼 민주주의에 봉사하는 저널리즘은 양적 팽창을 넘어 치열한 경쟁 국면에 들어갔다.

이즈음 대의제미디어(공영방송)에 종사하는 언론인에 대한 본원적 질문이 하나 있다. 참여민주주의와 구경꾼 민주주의의 긴장 속에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 저널리즘 본령에 얼마만큼 충실하는지, 지배적인 엘리트계급의 동의조작(미디어와 학교와 대중문화를 서로 분리함으로써 우왕좌왕하는 소떼들이 공동이익을 판단할 수 없도록 이끌어내는 기능)에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존재하는지, 나아가 포스트민주주의 경향 속에서 참여민주주의의 계기와 기회를 확대하는 비판적 지성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따위의 물음이다.

이 글은 대의제미디어 종사자들이 오늘날 비판적 지성으로서의 언론인의 역할을 얼마나 감당하는지를 평가하려는데 있지 않다. 단지 한 언론인이 살며 부딪히는, 실존과 실천에서 비롯된 진솔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고, 비판적 지성으로서의 언론인의 고민의 궤적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하는 글일 뿐이다. 언론인 고차원이 두어 달 전부터 패북에 남긴 글들은 이미 패북 친구들에게 두루두루 공감대를 주었다. 때론 안타깝게, 때론 불편하게, 때론 고맙게.

지난 10월 6일 MBC 인사위원회는 고차원이 지난 교육감 선거 시기 취재활동 등과 관련 조직 기강과 질서 문란, 상사 명예훼손, 명령 불복종 등을 했다고 회부했다. 고차원은 20여개의 항목에 대한 소명서를 내면서 “(회사의) 자의적 혐의사실이 모두 인정돼 징계가 내려진다면 회사로서는 이후엔 나같은 기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훌륭한 ‘경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의도를 간파했다. 고차원은 소명서를 마무리하면서 “혐의를 하나하나 돌아보니 정말 조직의 암적인 존재였더군요. 암은 도려내야지요. 아니면 암이라고 오진을 한 당사자에게 엄한 책임을 묻던가”라며 마음 다짐을 했다.

이즈음 고차원은 “동료 가운데 누군가가 정당한 일의 대가로 부당한 처우와 압박을 받고 있다면 난 친소관계를 떠나 그를 도울 것이다. 그가 밉다고 그가 정의를 위해 꺼내든 그의 용기를 폄훼해서는 안되고 그를 탄압하는 부조리한 세력을 옹호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라며 자신과 동료들과의 관계를 살폈다. 가령 “가장 두려운 것은 고통받는 존재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동료들의 눈빛과 마음을 확인할 때”이지만 “나를 압박하는 상대보다 고귀하고 공정한 척 하지만 침묵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리라”라고 생각을 다잡았다.

10월13일, 30일 출근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고차원은 재심 요청을 접었다. “재심은 최초 징계요청 사유와 양형의 적정성을 논하기보다는 1심 징계 후 재심까지 기간의 순종과 굴복 정도를 가늠할 게 뻔하기 때문”이라는 판단이었다. 고차원은 한 달간 급여와 상여금이 한 푼도 나오지 않은 데 대해 각시한테 제일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각시는 “저녁에 의자를 사지 마라. 어느 것이든 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힘들 때 아무나 만나지 마라.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을 것이다”라는 문자를 보내왔다고 했다. 그날 밤 고차원은 각시와 동태탕을 안주삼아 소주 두 병을 마셨다.

이날 고차원이 가장 아쉽고 서글프다고 지적한 건 조직문화였다. 보복성 인사가 두려워 정당한 문제제기조차 포기하는 게 당연시되는 것, 집단의 문제의식은 점점 희박해지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문화가 ‘질서’로 둔갑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고차원은 “다들 점잖고 내공있는 듯 보이는 기자들,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아쉬움을 피력했다.

▲ 11월 둘째주, 다치기 직전 홀로 걸은 지리산 둘레길
고차원은 지리산을 찾아 둘레길 5코스, 4코스, 3코스를 걸었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누구한테나 지리산이든 북한산이든 산골짜기 곳곳을 누비는 시간은 주어지는 법이다. 고차원은 지리산길 50킬로미터를 걸었고, 돌탑에 돌 하나 얹으며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출근 이틀을 앞둔 11월11일, 발목 골절로 병원에 입원하는 사단이 났다. 일각에서는 출근하기 싫어서 그런 거라며 농을 던졌다. 고차원은 무료한 병실에서 미드도 보고 쿵푸팬더, 인사동스캔들, 육혈포강도단, 공공의적 같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 대사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가령 쿵푸팬더를 보고 우그웨이 사부가 용의 전사로 지명받고 회피하려는 팬더에게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현재를 present선물이라 한다”고 한 대사나, “두사부일체 시리즈가 착한 조폭과 나쁜 조폭을 대비시켜 재미를 유발하지만 노조를 끌어들인 건 참 특이하다. 올바른 노조에 대한 갈증 탓일까. 조폭영화의 비중없는 소재까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는 대사를 노트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고차원은 ‘칼의 노래’에 나오는 “믿지 못할 아군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적이 더 낫다”는 말을 들어 “눈앞의 이익에 양심을 넘기고 지식인의 사명을 팽개치는 행태가 예전같이 지탄받지 않고 그 행위자 역시 죄의식이 희미해진 시대에 살면서 갈수록 생각나는 구절”이라고 말했다. 책도 어쩌면 먼지 덮힌 고전들만 고르는지,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이나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 같은 책을 읽고 소감을 남겼다. 문병 온 사람들이 왜 이런 책을 읽느냐고 물으면 “내 갈 길이 멀지만 이들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으려고”라고 대답했다.

11월23일, 고차원은 “눈앞의 적과 싸우지 않고 사정거리 밖의 적을 향해서는 폼 잡고 주먹질해대는 세태. 이런 껍데기 투사들은 결국 우리 역량을 갉아 먹는다”는 메모를 남겼다. 이같은 이들이 역사를 지연시키는 세력이라고 지적했다.

12월 1일 본부노조 집행부 네 명이 병원을 찾아 진상조사를 했다. 그들 스스로도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일이 조합 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고차원의 생각은 더 단단해졌다. 고차원은 “지금은 당사자들이 진실과 양심에 따른 솔직함보다 과거 행위에 대한 정당성 주장과 밀리면 끝장이라는 대결주의에 매몰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아울러 “최소한 저널리스트라면 내가 좀 불리하더라도 공적인 영역에서는 진실과 대의 편에 서야 하는 것 아닌가. 패거리 좀 가지게 됐다고 뻔뻔하게 되바래지거나 부끄러움을 잊는다면 상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 3주만에 퇴원하고 집에 왔을 때 가족들이 준비한 귀환 환영 상징물
고차원의 사유의 일단은 ‘중립’에 대한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고차원은 “중립은 방관, 비겁, 사적 이익 집착을 교묘하게 감춘 단어이다. 유일하게 중립이 순수한 의미를 살릴 수 있는 경우는 중립을 표방한 세력이 대립과 갈등을 종식하고 평화를 가져올 때”라고 정의했다.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의 체득으로부터 이같은 인식을 갖게 되는 건 범상치 않은 일이다. 보통 공정성이나 균형감 따위를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대의제미디어 종사자로서는 더군다나 쉽지 않은 일이다.

12월 5일, 고차원은 출근을 하루 앞두고 “아직은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을 내일 출근하면 보게 된다. 회사위계상 내 상급자들인데... 어떻게 첫 인사를 하거나 응대를 해야 할까?”라며 패북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십수 명의 패북 친구들이 조언을 남겼다. 12월 6일 출근을 했을 테다. 첫 인사를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하긴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건 아니다. 진실로 궁금한 건 깊고 넓어진 사유를 바탕으로 앞으로 펼쳐보일 삶의 파노라마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부담주는 일은 없어야겠다.

병실에 있던 지난 11월 20일, 고차원은 술과 함께 해보고 싶은 것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비가 곱게 내리는 오후에 마당이 보이는 온돌방에서 탕이나 김치찌개를 안주로 막걸리나 담근술 마시기, 하나는 늦은 밤 각시와 동태전이나 굴전을 부쳐 청주나 보드카 마시기. 청주와 보드카는 각시한테 양보하고, 막걸리와 담근술은 패북 친구들이 챙기면 되겠다. 자리가 만들어지면 그걸로 족하다. 참여민주주의네 구경꾼 민주주의네 같은 건 하나마나한 이야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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