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나이 등을 둘러싼 호칭과 관계의 문제는 녹록지 않다. <SBS 스페셜>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언어'와 '권위'의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바로 <왜, 반말하세요?>이다.

언어에서 시작된 관계의 해체

SBS 스페셜 ‘왜, 반말하세요?’ 편

다큐의 시작은 도발적이다. 방송국에 견학 온 고등학교 방송반 학생들과 선생님, 그런데 학생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흔 줄의 선생님에게 대놓고 '이윤승'이라 부른다.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다.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놓는다. 도대체 이 방송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윤승 선생님이 이윤승이 되기까지엔 '사연'이 있다. 학교 안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소문났던 방송반. 후배들은 저만치 선배가 가는 게 보이면 달려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하고 복창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연히 방송반의 모든 일들은 그에 따라 상명하복. 새로이 방송반을 맡은 이윤승 선생님은 이런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송반의 관례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바로 '내가 먼저 권위를 내려놓는 방식', 그래서 이윤승 선생님은 이윤승이 되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자신에게 이름을 부르는 학생들이 '나 이거 하기 싫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좋다고 한다.

‘호원이’가 된 도련님의 사례도 있다. 이미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를 통해 알려진 김진영 씨의 사례다. 결혼하기 전부터 친해서 '호원'이라 불렀던 남편의 동생.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서 편하게 불렀던 시동생에 대해 '도련님'이나 '삼촌'이라는 호칭을 요구하며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자신의 여동생들에 대해 남편은 자연스레 이름을 부르는데, 왜 남편의 동생에게는 호칭을 불러야 하는 것일까? 주변에서는 그냥 잠깐인데 참으면 된다지만 김진영 씨는 이런 호칭에서부터의 차별이 '여성의 삶'을 어그러뜨리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된다.

당신을 당신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

SBS 스페셜 ‘왜, 반말하세요?’ 편

가족은 물론 사회까지 우리 사회에서 '호칭'으로부터 시작되는 관계의 문제는 복잡하다. 그 이유를 전문가는 '너, 당신'이라는 직접적 호칭의 부재에서 찾는다. 207개의 언어 중 '너, 당신'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는 7개의 언어, 그중 하나가 한국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너와 당신을 부를 수 없기에 새로운 호칭을 찾아야 했고, 그를 위해서 당신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신상정보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

그런 언어의 특수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큐는 그 이유를 상명하복이 내재화된 우리 사회의 위계질서에서 찾는다. 5,6살 아이들의 키즈 카페에서도 '너 몇 살이냐'로 시작되는 위계의 파악, 위계가 파악되면 바로 형, 동생이 되고, 동생뻘의 아이에게 당장 '너라고 하지 마라'며 '형이니 내가 먼저할게'가 자연스러운 우리 사회의 권위적 질서 체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장유유서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다큐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고미숙 고전 인문학자는 조선시대 서당은 나이 차를 두지 않는 '통교육 체제'였음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은 나이에 대해 관대하여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신으로 학문을 논했던 기대승과 이황처럼 나이를 막론하고 우정을 나누는 사례가 흔했다고 전한다.

SBS 스페셜 ‘왜, 반말하세요?’ 편

오히려 이렇게 상대적으로 나이에 대해 관대했던 조선의 전통이, 일제강점기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민증부터 까고 보는' 연령별 위계질서로 고착되었다고 오성철 교수는 지적한다. 모리 아리노리에 의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군국주의 일본의 사상으로 채택되고, 일본을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사범학교를 군대식으로 재편했다. 이른바 '사범형 인간'은 상급생을 '신'으로 받들게 하며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퍼뜨렸고, 군대 내 상명하복의 질서를 고스란히 근대교육에 제도화한 데서 오늘날의 권위주의적 위계질서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민주의의 잔재는 오늘날의 위계질서를 만든 ‘50%’의 책임이 있다고 다큐는 부연설명한다. 즉, 식민지의 유산이 절반의 책임이라면 학도호국단, 국민교육헌장 등 일제의 관행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 교육이 오늘날 우리 사회 권위주의적 질서의 또 다른 한 축이라 다큐는 정의 내린다. 사회구조와 맞물려진 언어, 결국 정치적 권위주의가 일상의 권위주의가 되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관행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제기한 것이 바로 '수평적 사회를 향한 수평적 언어'에 대한 고찰이다.

일제 식민주의와 독재정권의 권위주의만이 문제일까?

단 몇 개월의 차이라도 형, 동생이 되는 우리 사회의 '연령별 수직 구조'에 대한 인식은 예리하다. 더구나 그 원인을 '식민주의와 독재시대의 권위주의'에서 찾고자 하는 바는 진일보한 접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획일적일 수도 있다. 다큐에서 사례로 등장한 <대리사회>의 소설가 김민섭 씨의 사례처럼, 대학원생이던 그가 대리 운전기사가 되자 당장 아저씨에서부터 '야, 너'로 호칭의 급격한 '전락'에서 보여지듯, 과연 우리 사회 권위적 호칭의 문제는 나이의 장벽만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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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는 독일 68세대에 의한 나치 잔재세력에 대한 일소를 통한 정치적 권위주의 해소 사례를 예로 들었듯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뒤늦게 대두되고 있는 일제 잔채 청산, 그리고 나아가 독재 잔재 청산에 대한 일련의 흐름에서 '권위주의적 언어'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하지만, 과연 몇몇 사례로만 제시한 조선시대를 덜 권위적 사회라 예단할 수 있을까? 대리 운전기사에게, 콜센터 직원에게 다짜고짜 '야'하고 하대하고 보는 그 의식은 외려 조선시대의 반상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 사회의 완고한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기원 역시 조선시대 유교를 차치하고서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대학원 내에서 교수와 대학원생간의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한 것이 수평적 언어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까?

다큐를 도발적으로 연 이윤승 선생님 역시 수평적 언어의 관계가 쉽지 않음을 토로한다. 우선 그의 혁명적 관계 시도는 동료 교사들의 불편함에 대한 토로로 고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이들과 말을 놓는 건 권위주의적 관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지 진짜 친구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고자 하는 건 아닌데, 수평적 언어가 때론 ‘관계의 혼돈’을 낳기도 한다고 고민을 전한다. 뿐만 아니라 다큐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IT기업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서 붐처럼 일었던 수평적 언어 관행으로서의 '별명' 혹은 '외국 이름' 부르기와 같은 움직임이, 상당수 ‘이름만’ 수평적이며 실제 관계는 수직적인 웃픈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다큐가 새로운 움직임으로 제시한 수평적 언어 모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는 이 모임을 통해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풀어낸다. 하지만 대표적 권위주의적 집단으로 제시된 해병대 전우회처럼 우리 사회의 다수, 그중에서도 남자 중 상당수가 군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상명하복'에 대한 고강도의 훈련을 겪고 그 논리를 내재화하며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탈권위적 사회를 향한 출발점으로서 수평적 언어에 대한 모색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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