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미디어법 부작위권한쟁의를 기각했다. 탄생 20년을 훌쩍 넘는 약관의 나이에 세상의 이치를 꿰뚫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헌재는 권한쟁의를 둘러싼 이해당사자 모두를 고려한 결정을 내놓음으로써 처세를 뽐냈다. 오호라 참으로 그랬다. 방통위와 종편사업자에게는 현실 행위의 정당성을, 피청구인인 국회의장(과 한나라당)에게는 과거 행위의 정당성을, 청구인인 야당에게는 미래 행위의 정당성을 각각 부여했다.

▲ 헌법재판소는 25일 `국회의장의 방송법안 등 가결선포 행위가 야당 의원들의 법률안 심의ㆍ표결권을 침해했다'는 헌재 결정이 나온 뒤에도 국회의장이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국회의원의 권한을 다시 침해한 것이라며 민주당 등 의원 85명이 국회의장을 상대로 낸 권한쟁의심판을 기각했다 ⓒ오마이뉴스
방통위와 종편사업자들은 일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나설 테고, 국회의장과 한나라당은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을 테고, 야당은 훗날 여건이 되면 위헌.위법을 들어 종편사업을 중단시킬 수 있을 테다.

법학자들은 헌재의 20여년을 돌아봄에 있어 ‘사법 적극주의’ 태도를 견지하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이른바 ‘제한적 적극주의’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헌재가 국민적 주목을 받은 것은 2004년 대통령 탄핵 사건과 수도 이전 사건 때였다. 헌재는 수도 이전 사건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으로 헌재는 단순한 사법기관이 아니라 사법기관이자 정치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일각에서는 사법쿠데타라고 비판했지만 이 역시 ‘사법의 정치화’의 또다른 표현이었을 뿐이다. ‘정치의 사법화’에 따른 ‘사법의 정치화’는 사법통치라는 조어를 낳았다. 사법통치의 비화는 의회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다. 두 차례에 걸친 미디어법 권한쟁의심판 결정은 입법부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입법부의 문제를 사법부에 맡긴, 즉 사법통치를 주문한 대표적인 사례다.

우연한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의 사법화’에 따른 ‘사법의 정치화’는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경향은 아니다. 웬디 브라운은 최근 미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정치적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입헌주의, 법 앞의 평등, 정치적․시민적 자유, 정치적 자율성과 보편주의적 포함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비용/수익 비율, 능률, 수익성, 효율성 같은 시장의 기준으로 대체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에 의해서 각종 권리와 정보 접근뿐만 아니라 정부의 투명성, 책임성, 절차주의 같은 여타의 입헌적 보호 장치마저 쉽게 회피되거나 무시된다. ... 다양한 정치투쟁과 쟁점은 점점 더 법원으로 넘어간다. 거기서 법 전문가들은 너무 복잡하고 난해해서 해당 분야의 전문변호사 말고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효율적이면서도 능숙하게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간단히 말해서 법원들은 제한을 부과하는 기능에서 입법적 기능으로, 즉 민주주의적 정치의 고전적 과제를 실질적으로 찬탈하는 쪽으로 넘어갔다.

일전에 콜린 크라우치도 미국과 서유럽 대부분 나라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소들은 포스트민주주의에서도 사실상 모두 살아남았다. 이 형식적 요소들은 ‘포스트’ 시대의 복잡성에 비추어볼 때 그 변화에도 불구하고 양립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몽과 환각에서 깨어난 눈으로 긴 시간에 걸쳐 관찰하면 최대 민주주의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민주주의의 요소들은 훼손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복지국가는 점점 잔여화(residualized) 됐다. 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수혜 요건을 갖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노동조합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국가 기능은 야경국가의 성격으로 두드러지게 회귀했다. 빈부 격차는 커지고 있다. 세금의 재분배 기능은 줄어들었다. 정치가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하고, 기업가의 특수 이익이 공공정책으로 둔갑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 정치와 민주주의 일반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정치의 사법화’에 따른 ‘사법의 정치화’는 필연적인 경향을 갖는다. 과거 정당과 사회운동은 정책 대결이나 대중 동원을 바탕으로 계급적 이해를 달리 하는 정치 쟁점들을 해결해왔다. 그러나 정당과 사회운동을 압도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와 구조화는 기존의 - 가령 87년체제 식의 - 민주주의의 구현을 가로막거나 다른 방식으로의 해결을 유도했다. 콜린 크라우치가 포스트민주주의를 언급하며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소는 그대로 살아남았지만 민주주의를 채워온 복지(내용)가 잔여화 되었다고 평가하거나, 웬디 브라운이 비용/수익 비율, 능률, 수익성, 효율성 같은 시장의 기준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대체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공격한다고 평가한 대목도 이를 관통한다. 이처럼 정당과 사회운동이 약화되고, 정당의 의회적 권위와 기능이 취약해지는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시작도 끝도 시장주의

입법부에서 ‘날치기’ 사건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십수 년 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나, 2004년 탄핵 날치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노동법 날치기는 여야 합의로 무마되었고, 탄핵 날치기는 헌재가 기각하면서 일단락됐다. 탄핵과 수도 이전 사건을 다루면서는 ‘정치의 사법화’에 따른 ‘사법의 정치화’의 경향성이 분명해졌는데, 그 중심에 헌재가 있었다. 그런데 미디어법 날치기는 노동법, 탄핵 날치기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미디어법에 녹아있는 시장주의 요소가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 과정을 관통한다는 점이다.

종편 및 보도전문채널 도입 기획은 명명백백 시장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이는 조중동의 정치적 성격, 즉 보수적이고 여론 획일적인 문제에 우선한다. 도입 취지에서 밝힌 글로벌 미디어그룹, 일자리 창출과 같은 수사는 진실성과 관계없이 전형적인 시장의 관점을 견지하는 것들이었다. 종편을 위한 광고시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아울러 인위적인 광고시장 확대를 위한 정책들, 즉 수신료, 미디어렙, 중간광고와 가상광고 도입 등에 따른 효과가 미비함이 확인되자마자, 정책입법자들은 즉각 전면적인 경쟁을 부추기고 나섰다. 출발이 시장주의에 있었던 지라 불거진 문제의 처방도 시장주의적인 것 외에 대체할 방안이 없는 것이다.

헌재가 1차 권한쟁의 때 3개월을 소요하고 ‘난해한 결정문’을 내놓은 이유는 미디어법을 둘러싼 시장 지배적인 현실을 정치적으로 판단해서이다. 1차 결정의 모순이 낳은 2차 권한쟁의 결정을 1년씩이나 미룬 것도, 그리고 기어이 기각이라는 판결을 내놓은 것도 마찬가지다. 재판관 9명 전원은 위헌.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재판관의 일부는 1차 때 판결을 번복하는 양심불량을 보였고, 원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결정하게 되어있는 점을 고려해 4(인용):4(각하):1(기각)을 통한 5:4 기각의 형식적 합의를 내놓았다. 헌재는 내용적으로 위헌.위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기각이라는 정치적인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법의 정치화’의 내적 모순과 한계를 만방에 보여주었다. 헌재는 ‘사법의 정치화’의 현재 수준에 충실한 결정을 한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검증된 것은, 입법부와 사법부를 포함해 당대 우리 사회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을 합리적으로 소화해낼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 위헌.위법하였고, 현실에 불법에 바탕을 둔 특혜 정책이 집행되는데, 의회(대의제)민주주의와 현존하는 모든 국가기구는 이를 바로 잡거나 규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즈음 정당운동이나 사회운동, 노조운동이 이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불행하게도 정당운동은 대의제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한계를 재생산하고 있고, (미디어)사회운동.노조운동은 정당운동의 수평 또는 하위 연대적 관계 속에서 사태의 진실을 폭로하고 선전하는 데 그칠 뿐이다.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수신료와 종편 싸움이 일단락됐다. 폭풍이 지난 자리, 승자는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한나라당은 경쟁 논리에 운명을 맡기게 되고, 방통위는 위헌.위법을 감수하며 꾸역꾸역 특혜의 정책집행을 감당할 것이고, 헌재는 ‘사법의 정치화’의 질적 비약의 기회를 뿌리쳤으며, 야당과 미디어운동은 현실을 개탄하는 것 외에 당장 수습 방책이 없는 형편이다.

이 승자 부재의 피곤함과 불법 난제의 불편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의회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사법부를 희롱하고 민주주의를 변형시킨 원인체가 시장주의가 맞다면, 시장주의가 종편의 탈을 쓰고 입법부와 사법부와 국민 모두를 조롱하는 게 맞다면, 요체는 단연 현실을 지체시키는 데 있다. 종편 추진을 지체.지연시키면서 과거를 잊지 않고,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다. 몸싸움 충격요법은 신통치 않음이며 단기필마 호연지기 묘책도 없음이다. 지금 야당과 야당상임위원과 사회운동.노조운동이 제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종편 지체.지연책이 무엇인지를 서로 묻고 답하며, 앞으로 최소 1년은 질질 끌어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