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이사회가 수신료를 현행보다 1,000원 인상한 3,500원 인상안을 심의.의결했다.

팩트(사실)는 이 짤막한 한 줄이다. 3,500원으로 결정되는 순간 수신료 인상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은 경악했다.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맞닥뜨린 공통된 놀라움은 KBS이사회가 컨센서스에 도달했다는 점, 그리고 3,500원이라는 액수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결론은 이사회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좀처럼 예상하지 못한 경우의 수였다. 이사회가 열리기 몇 시간 전까지 파악된 것은 단지 ‘여당추천이사들이 주도해서 표결을 한다’는 것 정도였다.

조중동은 KBS이사회의 컨센서스 앞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사설을 통해 저속한 계급적 욕망을 드러내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제 확인없이 10원도 안된다며 버텨온 시민사회는 1,000원씩이나 인상될 수도 있는 결정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10원도 안 된다는 기표는 기의를 상실했고 전제조건은 변주가 되었다.

KBS의 욕구를 실현하는 매개로서의 KBS이사회에 대한 시선은 수상했다. 민주적 합의 따위를 기대하는 시선은 없었다. 대부분의 시선은 다수결 처리에 익숙해 있었다. 주어진 수신료 인상 건은 합의와는 거리가 먼 첨예한 긴장이 담긴 사안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KBS이사회는 수신료 인상의 컨센서스를 도출해냄으로서 KBS이사회의 존립 근거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상당한 권위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이 컨센서스가 정당한 합의냐 야합이냐, 소모적이었느냐 생산적이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굳이 따질 거라면 상당히 소모적이었으나 주어진 룰을 지켰고, 대의적 합의에 도달했다고 보는 게 맞다.

▲ KBS 수신료 인상저지 100일 행동은 10월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이사회가 수신료 인상안을 강행처리할 경우 수신료 분리징수 운동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KBS 새 노조 파업 당시, 본관 앞에 화분을 놓아두었던 KBS는 이날도 '시청자가 주인입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회사 차량으로 본관 앞을 봉쇄하는 등 시민사회를 막아섰다. ⓒ곽상아
대의제는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사회운동이 유지하는 자율성과 다원성을 정초하는 사회적 시공간의 결과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조합적이지 않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출현할 수 있도록 하고 논란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 대의민주주의의 역동적인 원리는 사회의 갈등을 온전히 인정하고, 정치적.경제적.법적.미학적 영역의 차이를 인정하며, 습속과 태도의 이질성을 인정한다.(르포르) 따라서 KBS이사회의 컨센서스를 “복수의 의견들 간에 전개되는 진리없는 대결”(바디우)의 결과로 정의하고, 수신료 3,500원 인상의 시공간을 해석한다면 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3,500원안은 지난 7월 말 여당추천이사들이 일방 상정한 인상안을 철회한 후 소곤소곤 등장했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1,000원 인상안은 6,500원, 4,600원 인상안에 대해 방어적 알리바이로 제출된 의견이었다. 1,000원 인상의 근거는 단지 ‘물가 고려’ ‘국민 부담 최소화’ 뿐이었다. 후에 디지털전환 비용, 난시청 해소 비용 등의 주장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1,000원 인상의 용처를 분명히 한 것은 아니었고, 의결된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시민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수신료 3,500원으로의 결정을 내다본 사람은 야당추천이사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다.

주지하듯이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KBS에 대한 소기의 목적을 분명히 했다. 공영방송의 국(관)영방송화와 광고시장의 확장을 위한 수신료 재원 인상이었다. 이 임무를 완수할 적임자를 사장과 이사로 추천했다. 그래서 수신료 인상 처리의 시점과 방식은 사장과 이사의 자율적인 판단이 아니라 당정 차원에서 정세를 고려해 처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사회의 힘의 우위는 여당추천이사들에게 있었지만, 다수결 후에 만들어질 여론에 따른 역풍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여당추천이사들이 3,500원 인상안에 동의한 배경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정황을 종합컨대 사장과 이사들의 자율적 판단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맞다면 이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청와대의 레임덕이라는 평가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점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여당추천이사들이 다수결로 수신료를 강행처리할 것이라 믿었고 그에 대비하는 대응이 무엇일까에 골몰했다. 강행처리하면 전면 투쟁을 한다거나 분리징수나 납부거부 운동에 돌입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물론 이들 의지는 대부분 책임있는 기획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수사적인 것들이었다. 나도 알고 적들도 알고 기자들도 아는.

100일행동은 수신료에 대한 시민사회의 조합주의적 이해를 모으고 또 대의했지만 강행 처리 후를 내다보는 전략과 전술을 겸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3,500원으로의 컨센서스 이후를 내다보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사회운동은 이 공백을 스스로 메꾸는 노력 대신 정당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우회했다. 물론 데모스의 자기-입법 의지가 실종된 것은 아니었다. 이사회라는 규제기구의 제도적 한계를 지적하며, 공영방송의 재원 운용에 관한 대안적 제도로서 수신료위원회를 제기하기도 했다. 제기하는데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한계는 분명했지만.

▲ 김영호, 진홍순, 고영신, 이창현 등 KBS 야당 이사들ⓒ곽상아
행정부의 레임덕이나 그와 관계없이 사장과 여당추천이사들의 자율적 개입이라는 상황진단이 맞다면, 시민사회의 위와 같은 상태 진단이 맞다면, KBS이사회는 이같은 힘의 역관계를 주체적으로 돌파하며 주어진 대의적 소임을 감당해낸 것으로 평가된다. 일방 상정안 철회후 4개월에 걸친 여야 이사들의 실천의 산물이었다. 이는 이창현 이사의 미디어스 인터뷰 내용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창현 이사는 수신료 인상안 컨센서스의 의미를 정확히 평가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지까지 덧붙였다.

“야당 이사들에 대한 비판도 수용한다. KBS이사회는 국민을 대표해서 이사들이 선임되었으며, KBS의 조직적 이해보다는 국민을 먼저 대표해야한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수용한다. 그러나 KBS의 공정성, 독립성 강화는 한 번의 선언으로 해결될 사항이 아니다. 이는 공정방송위원회 설치 등 사내 노력과 야당 이사들의 이사회 내부 감시, 예산·결산의 감시, 편성 내용 감시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항이다. 수신료 합의 처리 이후, KBS이사회에서 KBS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담보 노력을 더욱 강하게 촉구할 것이다. 이제부터 KBS이사회를 통한 일상적 감시 체제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의지가 정치적으로 예고하는 것이 있다. 이사회 존립과 역할에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사회가 대의적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효과를 부른다는 점이다. 이창현 이사는 수신료위원회 체제와 KBS 구조 개편 논의 과제까지 제기함으로써 KBS이사회의 한계와 역할을 보완할 새로운 대체규제기구 문제 역시 순방향에서 이뤄질 수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 김인규 사장의 22일 기자회견과도 맥이 닿아있고 필연적인 현상이다.

한편 야당추천이사들은 3,500원안을 종편에 주지 않는 수신료 인상안으로 자평한다. 당장 조중동이 보인 태도나 당장 산출할 수 있는 내역으로 보면 정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단정은 오해이며 사태 추이에 따라 기만일 수 있다. 3,500원안은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안이 아니며, 인상분의 용처와 분리회계와 같은 전제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김인규 사장의 기자회견에서 확인되듯 추후 추가 인상과 광고비중 조정에 따라 얼마든지 광고시장으로의 재원 유출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아무런 전제가 확인되지 않은 3,500원 인상안은 이같은 기획에 불쏘시개로 작용될 수 있다. 더군다나 야당추천이사들의 3,500원 인상안은 시민사회로부터 단 한 차례도 동의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시민사회의 비판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이점이 전술적 효과를 전략적인 성과로 치환하거나 과도한 승리적 평가를 내놓는 것에 신중해야 할 이유들이다. 그렇다고 이같은 한계를 들어 이사들에게 책임을 묻고 사퇴를 종용하는 것은 철없는 행동이다.

시민사회를 주어로 놓고 수신료 대응 평가를 하자면 이렇다. 단 한 번도 흔들림없이 국면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견지했다. 다만 현재로서는 뜻하지 않았던 3,500원 인상안의 효과에 파묻혔다. 수신료에 대한 자기 결정 능력, 데모스의 자기입법의 전망을 밝히기도 전에 예기치 않은 ‘바통’의 출현과 작동을 일시적으로 쳐다보는 처지가 됐다. 물론 성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KBS이사회라는 대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복수의 의견들 간에 전개되는 진리없는 대결”의 실체적 진실을 간파하며 데모스의 자기 통치의 가능성을 재고할 것이다. 국면을 좌지우지하는 주어는 시민사회라는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임을 확인한다.

아무튼 수신료를 둘러싼 국가, 정당, 시민사회 간에 진검승부가 이전보다 더 흥미진진한 국면으로 우리 모두를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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