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가짜 뉴스다. 한겨레가 ‘가짜 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란 제하의 기획으로 극우 기독교 세력의 가짜 뉴스 생산 과정 등을 취재해 보도한 영향이다. 한겨레의 1일 보도는 이들이 정치권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구체적 이권을 모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데에서 파장이 크다.

특히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여론 조성 기획 시도의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가장 가까운 예는 많은 사람들을 불안 속으로 끌고 간 예멘 난민 관련 문제였다. 당시 SNS 등 인터넷 공간에서 무슬림 문화를 대상으로 한 전형적 혐오를 조장하려는 움직임은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필터’를 거친 것으로 볼 때에야 이해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한겨레의 보도는 이 필터의 ‘실체’에 한 발짝 더 다가 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동시에 가짜 뉴스가 강한 인화성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석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한겨레를 비롯해 기성 언론이 최근 주목하는 플랫폼은 유튜브다. 공중파 등 주류 미디어에서 밀려난 보수 인사들이 유튜브에서 가짜 뉴스의 주요 공급처가 되면서 위력을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가짜 뉴스의 진원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보수적인 노인 세대의 접근성이 SNS보다 낫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물론이고 카카오톡 등의 스마트폰 기반 메신저도 노인 세대가 자유자재로 이용하기에는 일정한 장벽이 있다. 하지만 유튜브는 스마트폰에 일단 설치만 해놓으면 간단한 조작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송을 찾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보수 유튜버’들이 채널명을 ‘자신의 이름+TV’라는 직관적인 형식으로 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둘째는 재정적 대책을 찾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것이다. 유튜브는 구독자 등의 기준에 따라 일정한 광고 수익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자율구독’ 등의 형태로 초기의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다른 ‘뉴미디어’ 플랫폼보다 수익을 내기가 어렵지 않다. 특히 가짜뉴스에 열광하는 충성도 높은 시청자층이 존재하는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겨레의 보도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이 충성도 높은 시청자층은 기성 언론의 보도를 불신한다. 이들의 이런 성향은 이전 정권의 국정농단 국면에서 JTBC 최순실 태블릿PC 관련 보도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언론은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좋은 말’을 지어내면서 뒤로는 정권과 한통속으로 검은 거래를 불사하는 부류다. 게다가 이들이 볼 때 현 정권은 북한의 기득권과 특수한 관계를 형성한 이른바 ‘종북’이다. 그러니 더더욱 가짜 뉴스와 ‘보수 유튜버’들의 극단적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지난 9월 18일 서울 종로구 종로타워 앞에서 열린 '난민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들의 이런 행동 양식을 과연 보수적인 노년층의 것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정확히 반대의 모습을 우리는 현 정권을 지지하는 이들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보수정권에서 이들은 팟캐스트 등 대안 언론을 신뢰했고 기성 언론의 보도를 비평하기보다는 ‘불순한 배후’를 찾는데 주력했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정치가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이념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우리 모두의 ‘의심’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되었다. 이것에 대한 대중의 복수가 촛불시위였고 ‘정상화 작업’의 결과물이 바로 문재인 정권의 탄생이다. 현 정부 지지자 일부는 좌우와 모든 언론이 정권을 흔들려는 불순한 시도를 할 것이라며 참여정부가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실패했으므로 이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근거 중 상당수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이런 주장을 강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정치의 ‘비정상성’은 양 극단의 사람들을 공론의 영역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달성될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이 ‘중도’의 영역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 틀을 갖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자신이 이 정권과 결을 달리하는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제각기 서있는 자리가 다를 뿐 ‘기득권의 음모와 결탁한, 의도가 불순한 너’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다들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가짜 뉴스 문제는 사례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구도의 반동형성에 불과하다. 말할 것도 없이 ‘대안적 진실’은 ‘진실을 믿을 수 없다’는 인식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헬조선’이 문제인 것일까? 우리가 직면한 것과 정확히 같은 현실 인식이 19세기 초 미국인들의 언설에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어떨까? 미국 초기 연방주의자들은 토마스 제퍼슨을 공격하기 위한 다양한 논리를 동원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제퍼슨의 지적 우월성을 어떤 종류의 ‘불순함’과 연결 짓는 것이었다. 제퍼슨은 백면서생이라 현실을 모르는 교조주의자이며, 정치의 실질보다 명성을 얻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고, 독립전쟁 때는 겁쟁이였으며, 친프랑스주의자(오늘날의 종북론과 의미가 통할 것 같다)로 또 다른 독재자일 수밖에 없는 미국의 나폴레옹이 되려고 한다는 것 등이 그렇다.

사실 미국 정치인들의 이런 어법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중단된 일이 없다. 현재 미국의 (극우적)포퓰리즘은 공화당 정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분야의 대표격 인물은 민주당이 정치적 시조로 삼는, ‘잭슨주의’로 유명한 앤드류 잭슨 전 대통령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자신의 집무실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역시 ‘시스템’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정치 세력 또는 정치인에게 표를 던진 결과로 국가의 방향이 좌우되는 대의민주제 하에서는 냉소주의적, 음모론적, 반지성주의적 정치 캠페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세력과 정치인이 표를 모으기 쉬운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짜 뉴스는 바로 이 맥락에서 행위의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의민주제 그 자체가 아니라 ‘표를 던지는’ 행위가 체제의 일부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근대적 체제는 제도로서의 대의민주주의, 사회문화적 원리로서의 자유주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연합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표를 던지는 행위’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현대정치에서 ‘표를 던지는 행위’는 체제의 운영을 위임하는 의미의 정치 행위라기보다는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거나 ‘정치 상품’에 대한 구매 또는 투자로 둔갑하기가 일쑤이다. 이를테면 가짜 뉴스의 문제는 주식시장 작전세력의 주가조작으로 치환될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최근 논란의 되는 포퓰리즘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 멕시코 출신의 정치학자 벤자민 아르디티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속하면서도 부정적 영향을 일으키는 ‘내적 주변부’로 정의한 바 있다. 즉,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급진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샹탈 무페 등이 ‘좌파포퓰리즘’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포퓰리즘을 적당히 이용해 정권을 탈취하자는 블랑키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가짜 뉴스를 앞세운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대안은 분노한 대중으로부터 엘리트가 주도하는 기성 체제를 지키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중이 엘리트를 대신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근대정치 자체가 재발명 재정의 재전유 되어야 한다. 가짜 뉴스 문제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일부 노인 유권자층이 아니라 민주 정치의 근본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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