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귀경으로 역사적인 3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간 협상의 얼개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 바야흐로 ‘본 게임’이 시작되는 모양새다. 이제부터는 애초 예상보다 훨씬 급격한 상황 변화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수세력은 이런 변화에 전혀 준비된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조선일보의 보도를 보면 3차 남북정상회담은 완전한 실패다. 이 신문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대화 성사를 위해 ‘한반도 수퍼 갑’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기득권의 비위를 맞추고 우리 안보와 관련돼있는 수많은 것들을 쉽게 포기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청와대는 거짓말과 연출된 ‘쇼’에만 몰두했으며 심지어 남북정상회담 성과 희석을 우려해 퓨마 사살에까지 간여했다.

조선일보는 특히 해상 적대행위 중단 구역 합의를 우리가 북한에 양보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추석 여론을 염두에 둔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걸 뒤집어 보면, 이 신문이 의도하는 게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추석 밥상 여론전을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을 보면 애초 북미대화를 제 궤도로 돌려놓기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에 방점이 찍혔던 3차 남북정상회담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19일 합의 발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북한 핵사찰 수용 관련 메시지를 올렸고 이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에 협상 재개를 제안하는 성명을 냈다. 북미 양측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핵화 실무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쯤되면 ‘중재자’ 외교가 빛을 발했다고 평가할 만 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설명을 들으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간 미국이 비핵화 원칙으로 언급했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원칙에 상당 부분 동의한 것으로 느껴진다. 남북의 합의 내용 중 비핵화에 관한 대목은 동창리 미사일 발사 및 엔진 시험장과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는 부분이다.

특히 북한은 미사일 시험장 폐기와 관련해 유관국들의 참관을 허용하겠다고 했다. 또 영변 핵시설에 대해선 미국의 상응조치가 있을 경우 영구적 폐기를 하겠다고 했다. 종합해보면 협상 진행 내용에 따라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수용하고 관련 시설을 완전히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를 방문, 취재진에게 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지시간 1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온 서신을 새롭게 언급한 것은 이런 맥락을 강화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엄청난 서한을 받았다”며 “그것은 3일 전(현지시간 16일)에 배달됐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대단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북한이 별도 채널로 미국을 만족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20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에 담기지 않은 북한의 입장을 설명하겠다고 했는데, 같은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앞서 맥락에 비추어 보면 결국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 수용과 종전선언 등을 맞바꾸자는 내용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전반적 합의사항은 올해 내로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은 북미대화에 진전이 없는 경우 의미가 퇴색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연내’란 11월 초로 예정된 중간선거 이전을 의미한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중간선거를 고려하면 최대한 판을 키워 ‘빅딜’을 이뤄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판돈을 키우면 북한이 요구사항을 늘려가는 ‘가격 맞추기’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그야말로 ‘원샷’으로 비핵화 관련 초기 조치가 결론이 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여전히 완전한 극복이 쉽지 않은 장애물이 잠복해 있는 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북한은 주요 협상 대상으로 영변 핵시설을 상정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미 ‘강선’이란 이름의 핵시설이 추가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 밖에도 고농축우라늄 생산을 위한 원심분리기가 이외의 지역에 존재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시설들 역시 사찰 범위에 넣기 위해선 ‘특별사찰’을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거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주권침해’로 규정하고 거부했었다.

그러나 과거 9.19 공동성명 및 10.4 선언 시기와는 달리 북한과 미국 양쪽이 모두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구도가 유지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10월 내에 북미 간 모종의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최소한 남북미 3자 간의 종전선언 정도는 기대해볼 만한 상황이다.

올해 종전선언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 일정까지 치르고 나면 내년은 본격적인 평화협정 체결 및 북미수교 국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서의 논의에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들이 낄 수밖에 없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전망이다.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 시리아 등 중동 문제에 손을 대고 있는 러시아, 개헌을 통한 재무장을 노리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속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 보는 것이 어렵다.

어쨌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전진하며 현실을 바꿔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국내 보수세력도 추석 밥상 여론이나 누가 무엇을 얼마나 더 양보했느니 하는 작은 계산에 몰두할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따져야 한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 평화체제가 실제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하겠는가 등의 문제이다.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라도 ‘불순한 거짓말쟁이’ 프레임은 하루 빨리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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