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6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세 논의를 제안하며 든 근거는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평화공동체’ 구축”이다. 평화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야 경제공동체, 민족공동체, 한민족의 통일을 바라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비핵개방3000의 맥락과 같은 ‘선비핵화 후통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설득력 하나도 없다.

통일세 이야기는 이명박 대통령이 처음 한 건 아니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당시에도 통일세를 일각에서 거론한 적이 있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던 시기에도 제기된 적이 있다.

가령 1998년 3월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설 국민경제연구소가 국민 1천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에서 통일세 부담 의향에 대해 ‘부담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72.1%로, ‘부담할 의향이 없다’(27.2%)는 응답보다 훨씬 많았으며, 부담 의향이 있는 응답자의 70.2%는 개인소득의 5% 내외를 부담하겠다고 답했다. 1996년 3월에 실시한 조사에서 향후 10년동안 개인소득의 10%를 통일비용으로 납부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61.8%가 ‘있다’고 응답했다.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됐지만 당시 통일 지향적인 시민의식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개인 소득의 일정 비율을 통일비용을 위한 세금으로 낼 수 있다는 일종의 직접세인데,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하는 부가가치세 인상과 같은 간접세와는 뜻이 다르다.

2007년 기획예산처의 2006~201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통일 예산은 2006년 2,218억원, 2007년 1조716억원, 2008년 1조1,710억원, 2009년 1조3,943억원, 2010년 1조5,885억원 이었다. 이즈음 통일연구원은 향후 경협에서 논의될 사업별 추가 소요 비용과 관련, △북한의 노후화된 화력발전소 개보수 1,000억원 △전력 발전을 위한 무연탄과 중유 지원1,500억원 △남포항 원산항 나진항 등 주요 항만의 하역시설 확충 2,000억원 △시범 농장 조성 및 농업 기자재 생산공장 건설 500억원 등이 될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정부 내에서는 소요 비용 조달 방안으로 별도의 신탁기금 조성 외에 목적세로서의 통일세 신설 방안을 거론한 바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직후 경제협력 분야 합의 내용을 계획대로 추진될 경우 10조2,600억 원의 재원이 필요하다는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타 기관에서도 향후 10년간 경협비용이 최소 6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는 등 소요 자금 조달 방안이 현안으로 대두됐다. 이때도 정부는 민자와 외자를 통해 20조원을 조달하고 채권 발행으로 16조5,000억원, 그리고 통일세, 평화세와 같은 신설 세목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경협을 잘 계승했다면 지금쯤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테다. 그 연장에서 남북경협과 남북 관계 발전을 위한 통일세를 제시했다면 지금과 같이 황당하다는 식의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분단 이후 분단모순을 해결하는 실질적인 방안은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반제반봉건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이었다. 역사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지만 현실적 의미는 소멸됐다. 또 하나는 남북연합론(낮은연방제론)의 연장에서 추진된 남북경제공동체론이었다. 이는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으로 구체화되었으나 최근 단절됐다. 이 두 가지 방안 외에 분단모순 해결 방안으로 꼭 들어야 한다면 ‘비핵개방3000’이 있겠는데, 흡수통일의 뉘앙스를 포괄하는 칠칠치 못한 방안으로 나란히 놓기가 좀 그렇다.

참여정부의 동북아시대위원회는 ‘동북아경제공동체구상’을 제시하고 추진해왔다. 참여정부의 경제공동체 개념은 FTA, 환율, 에너지, 물류 등 역내 공동 현안 해결을 위한 정책 협의 및 공조단계로서의 ‘동북아경제협력체’와, 통화 통합 등 실질적인 단일시장 형성과 거시경제 및 대외경제정책 등에서 공동정책을 수행하는 단계로서의 ‘동북아경제공동체’로 구분된다. 실현 가능하고 용이한 사업부터 추진하는 단계적 접근원칙, 다양한 협력사업과 FTA를 동시에 추진하는 동시병행원칙, 동북아경제협력을 통해 북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남북경협과의 연계원칙을 추진원칙으로 삼았다. 시기적으로는 2006-07년 경제협력의 제도적 기반 조성, 2단계(2008-2012년) 경제협력 본격화, 3단계(2013년 이후) 동북아경제공동체 이행기로 설정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월 4일 남북정상선언을 함으로써 ‘남북경제공동체’는 구체적인 실체로 등장했다. 참여정부식 어법으로 말하자면 평화번영정책의 결실이고, 동북아경제협력체와 동북아경제공동체 구상의 시작이고, 동북아경제통합의 비전을 여는 개념이다. 자본운동으로 보자면 살아있는 노동력 활용과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기반한 자본 투자 여건을 개선하는 일이고, 자주민주통일운동의 맥락에서 보자면 분단을 넘어 통일 시대를 여는 역사적 표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보고를 통해 북에서 느낀 ‘벽’을 언급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창설, 남북 철도, 도로 연결 및 공동이용, 기존 3대경협과 경공업-지하자원 협력 차원에서 수산업, 중화학공업(조선공업), 골재 채취, 농업, 기반시설, 자원개발 등 경협 보따리를 풀어놓으면서도 북의 개혁개방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소감을 전했다. 북의 입장에서는 남과의 경협 자체가 대외개방이고, 따라서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를 갖는 등 조심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북의 입장에서 개혁개방은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며, 개혁개방에 대한 딜레마를 안고 있는 과도적 상태라는 점을 체감했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북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견지했고, 북이 급격하게 붕괴한다면 비용이 얼마라는 둥 상대를 자극하는 식의 몰상식한 접근을 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책정된 남북협력기금 1조1,189억1,500만원 중 3.32% 수준인 371억6,400만원을 지출했다. 2,000년 이후 남북협력기금 집행률은 2001년 56.1%, 2002년 50.0%, 2003년 92.5%, 2004년 65.9%, 2005년 82.9%, 2006년 37.0%, 2007년 82.2%였으며,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2008년 18.1%, 2009년 8.6%로 뚝 떨어졌다. 손에 들고 있는 예산도 안 쓰면서 세금을 걷자는 건데,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익숙한 장면이다.

▲ 김인규 KBS 사장이 지난 6월 14일 오후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KBS 수신료 현실화 공청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KBS의 2009년 당기 순이익은 693억원, 2010년 당기순이익 예상치는 최소 1,000억원, 지역국의 불용자산 처분예상액 702억원, 직원 및 자원관리원 대여금 잔액 440억원의 일부 등을 합치면 2009년 수신료 수입의 절반 규모를 훌쩍 넘는다. KBS가 현재 규모를 유지한다면 앞으로도 이같은 흑자는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공적 책무, 시청자 서비스 강화에 얼마나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는 건지를 설명하지 않고 수신료를 인상하자는 당위만 되풀이 하니 공감이 될 리가 없다.

김인규 사장은 지난 7월 30일 사보를 통해 ‘수신료 현실화’를 위해 노와 사가 힘과 지혜를 모으자고 호소했다. 시청자에게 문화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공영방송 KBS가 공영방송 다울 수 있게 하는 절대적 필요조건임을 근거로 들었다. “공영방송인으로서 공적 책무에 매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인규 사장이 제시하는 수신료 인상의 근거는 대부분 추상적이고 수사적인 표현으로 대체될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말씀하신 ‘평화공동체’ ‘한반도의 비핵화’ ‘경제공동체’ ‘민족공동체’ ‘한민족의 통일’과 같은 언급과 김인규 사장의 레토릭이 어쩌면 이리도 닮은 꼴인지, 신통하기만 하다.

통일세도 수신료도 말만 잘 하면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텐데 두 분 정말 말부터 잘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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