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 오후 3시 광주미디어센터에서 열린 'TV수신료 현실화 광주공청회'의 모습ⓒ권순택
7월 28일 KBS이사회가 수신료 관련 합의문을 의결하고, 같은 날 KBS새노조가 파업을 마무리하며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자연스럽게 ‘논의와 합의’ 국면이 만들어졌다. 나쁘게 평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사회적 합의의 주체들이 합의를 위한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데 있다.

사회적 합의체제는 코포라티즘으로 설명되는데 크라우치는 “조직된 이해집단이 구성원의 이익을 대표하는 동시에 보다 전체 사회 수준에서 보다 일반적인 이해에 관한 합의를 기반으로 구성원들을 규율하는 체제”로 정의했다. 한국에서 코포라티즘은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8년 2월 노사정합의를 전후해 활발한 논쟁이 진행됐다. 당시 코포라티즘론자들은 합의에 이른 사실과 경제위기 극복에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합의 주체 간의 신뢰와 타협의 기반과 같은 한계의 측면은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노사정 합의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노사정위원회나 합의기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등 논란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합의는 대립되는 관계에 있다. 시장의 자유를 확대하고 사회적 규제를 철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와 이해당사자들이 타협과 협력을 통해 시장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유지하려는 코포라티즘 기제가 공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어떤 수준의 합의냐, 즉 사회적 합의의 내용이나 지속성을 보장하는 조건을 갖추느냐의 측면도 중요하게 평가된다. 적대하는 이해당사자간 신뢰와 타협의 전통이나 제도적 조건이 취약한 상황에서 합의 주체들이 이익 계산과 전략적 선택으로 합의에 이를 경우 사회적 합의는 실질적인 힘을 갖지 못하게 된다.

수신료 인상은 공영방송 재원 안정성의 필요에 따라 꾸준히 제기되었다. 아울러 현행 수신료 인상 제도가 갖는 한계도 지적되었다. 여당 추천이사들이 수적 우세를 이용해 인상안을 상정했다 철회하는 해프닝도 현행 수신료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다. 7월 28일 이사회의 합의(△수신료 인상안이 2010년 정기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시한을 고려해 심의·의결할 것 △수신료 인상안 논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 △여야는 KBS 사측의 1안(4600원), 2안(6500원)을 포함해 인상 방안에 대해 충분히 논의할 것 △수신료 인상안 논의와 의결은 양측이 합의해 처리할 것)는 위임받은 주체들의 합의일 뿐 사회적 합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KBS 사측과 KBS새노조는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고 천명했지만 사회적 합의의 주체와 방식을 적시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선언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금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추상과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면 문제의 이성적 해법은 찾기 어려워진다.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수신료 재원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이고, 하나는 수신료 인상 논의 주체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수신료 인상안을 제출하는 주체로서의 이사회 내지 KBS 사측은 수신료 인상의 근거와 산출내역을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사회적 합의의 주체로 공영방송 당사자와 시민사회, 정치권 등이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방식을 설정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면 일단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의 출발이 가능하다.

미디어행동은 11일 회의를 통해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의 최소 조건으로 세부 산출내역 제시와 종편 광고시장을 고려한 인상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이사회가 특정한 인상안을 제시하면 산출내역 확인과 함께 인상의 전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임하기로 했다. 한편 인상의 전제조건으로는 제도 개혁과 민주적 운영 및 공적 서비스 강화를 들었다. 제도 개혁은 △수신료 제도 개혁 △규제기구 및 민주적 사장 선출 제도 개혁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을, 민주적 운영 및 공적 서비스 강화는 △회계 분리 △제작.편성의 자율성 △디지털 난시청 해소 및 무료보편적 서비스 강화 △퍼블릭엑세스 개선 △시청자위원회 개선 △ 공영방송 컨텐츠의 공개 라이선스 채택 등을 열거했다. 지난 4월 29일 발표한 공영방송 국민컨설팅보고서의 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새로운 내용들은 아니다.

말하자면 미디어행동의 경우에는 여건만 되면 얼마든지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데, 문제는 인상안을 제시하는 당사자인 KBS가 꿈적도 않는데 있다. KBS는 KBS새노조와 함께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노력’을 천명했지만 김인규 사장이나 손병두 이사장이 ‘사회적 합의’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도무지 확인이 안 된다. 아직까지 ‘수신료의 사회적 합의’ 제안의 코멘트가 없는 걸로 미루어 ‘연내 국회 처리’라는 이사회 합의에 기대 날짜만 꼽고 있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 기다 아니다 의사 표시 만이라도 하는 게 공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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