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 소재와 방식, 방영되는 방송사도 모두 다르지만 지금 월화와 수목의 저녁 시간대를 지배하고 있는 드라마에는 묘한 쌍둥이가 출연하고 있습니다. 둘 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고 예쁜 부인‘들’을 두고 있으면서 유능하고 자상하고 똑똑한 멋진 중년의 남자들이죠. MBC의 월화드라마 ‘동이’의 로맨틱가이 지진희가 연기하는 숙종과 KBS 수목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거성구룹 사장님인 전광렬의 구일중이 바로 이들입니다. 저에게 이 두 남자들은 시대만 바꾸어 태어난 두 쌍둥이 같아요.

선과 악, 정파와 사파로 분류되는 단순한 구도를 사랑하는 두 드라마 상에서 이들은 모두 선한 쪽에 속해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왕으로서, 또는 회장으로서의 막중한 역할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똑똑한 남자들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높고 깊은 인품에 감복하고 뛰어난 능력에 매료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위의 시선과 평가,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신분이거나 자신의 사생아에 불과한 주인공인 동이와 김탁구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 주는 삶의 버팀목이고 위기 때마다, 혹은 흔들릴 때마다 정신적 지지자이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이들은 뛰어난 개인적인 자질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악독한 부인을 만나 그녀들의 등쌀에 시달리며 곤란한 상황을 감내해야하는 희생자처럼 그려집니다. 모든 분란과 사건은 바로 장희빈과 서인숙이란 가장 가까운 그들의 배필에게서 시작되고 그녀들과 그 말을 충실히 이행하는 장희재, 한실장과 같은 추종자들로 인해 문제는 꼬여가고 비극은 발생합니다. 똑똑하고 착한 남편과 무능하지만 악독한 부인. 두 드라마의 갈등의 출발점은 바로 이 기묘하고 어울리지 않는 부부 사이의 갈등이에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선하고 착하게만 보이는 숙종과 구일중 사장이야말로 착한 남편을 가장한 나쁜 아빠들이 아닐까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부인들에게 악행을 유도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문제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요? 혼자서 고고하게 부인을 꾸짖거나 외면하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자신들의 애정을 주인공 동이와 김탁구에게 쏟아 붓지만 본래 마땅히 받았어야할 그런 사랑의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절망과 자괴감, 괴로움이 그들의 부인들을 삐뚤어지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야망이 넘치긴 했지만 동이에서의 장옥정은 본래 현명하고 똑똑한 매혹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그녀 자체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장옥정의 배경과 야망을 이용해서 궁궐 내의 세력 판도를 견제하고 조절하려 했던 것은 숙종 본인이었었구요.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조정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에게 첩지를 내린 것은 숙종 본인의 판단과 결정이었습니다. 장옥정에게 숙종은 전쟁 같은 궁궐 내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힘이자 위안이어요. 하지만 그의 지아비는 인현왕후에게서 자신에게 왔던 것처럼 또 다시 그의 애정을 동이에게로 돌려 버렸습니다.

서인숙은 또 어떤가요?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사랑스러운 딸을 두 명이나 가지고 있었고, 남편이 일구어 놓은 거성 그룹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그 누구보다도 강했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옛 사랑을 저버리고 선택했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룹의 후계자를 만들어야 한다며 아들만을 목 놓아 말하던 시어머니의 등쌀에 남편은 아무런 방어막이 되어주지 않았고 도리어 그녀는 남편에게 차갑고 냉정하게 내쳐질 뿐이었죠. 결국 남편은 식구처럼 일하던 가사도우미와 불륜 관계를 통해 아이까지 만들어 버렸고 시어머니는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옹호하기에 빠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인들이 안 삐뚤어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어요? 남편에 대한 사랑은 보답 받지 못했고, 지금까지 힘겹게 쌓아올린 자리는 새로운 도전자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서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줄 후계자에 대한 갈망과 집착뿐이었습니다. 남편의 부정을 기억하는 서인숙이 아들의 여자 문제에 민감한 것도, 자신이 인현왕후로부터 숙종을 빼앗았던 것처럼 임금님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몰라 고민하는 장희빈의 고민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사정과 상황이 이들의 악행과 잘못 모두를 해소시키고 이해해줄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온전히 그녀들만 잘못되었다고 하기엔 이들 역시도 가장 가까운 이인 남편에게 버림받았기에 삿대질하는 손가락이 못내 어정쩡하고 찝찝할 수밖에 없어요.

나쁜 남자를 표방하는 드라마도 있고, 그런 타입의 사람들에게 매혹당하기는 이들도 있다지만 이런 식의 나쁜 아빠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착하기는 한데 부인한테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애정을 엉뚱한 곳으로 쏟아 부어서 부인을 나쁘게 만들어 버리는, 도리어 피해자로 탈바꿈한 이들은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아무리 드라마속 이야기에다 왕실과 회장집 사람들의 이야기라지만 현실에서라면 부인만큼이나 욕을 먹어야 할 사람들은 이들 남자들이거든요. 어쩌면 그래서 저는 동이와 김탁구 모두 이들 나쁜 아빠들 때문에 더더욱 장희빈과 서인숙에게 더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들이야말로 악녀, 혹은 가해자이기 이전에 가장 사랑받고 존중받아야할 남편들에게 버림받은 피해자거든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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