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북미정상회담의 장소는 싱가포르로 낙점됐다. 이후 북미 간의 협상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평양 방문 문제가 재론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미국 내 부정적 여론을 감안하면 현실 가능한 대안은 싱가포르뿐이라는 판단이 내려진 걸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현지시간 10일 트위터에 장소와 날짜를 전격 공개하면서 북미정상회담의 개최는 사실상 확정됐다. 북한도 노동신문 등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회동을 대서특필해 이런 상황을 뒷받침했다. 정상회담 성사가 됐다는 것은 북미대화의 실패 가능성이 한층 줄어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일종의 ‘보증’은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들의 석방이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 일정을 통해 진행된 협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공항에 직접 나가 이들의 귀환을 맞이하는 ‘리얼리티 쇼’의 형식으로 귀결되었다.

미국 내 분위기가 북미정상회담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난해 6월 사망한 오토 웜비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오토 웜비어는 2016년 1월부터 북한에 억류돼있다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지난해 6월 미국에 송환됐다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북한에 대한 미국인들의 적대적 감정을 고취시켰으며 트럼프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태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북한이 한국계 미국인들을 석방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이 당시 상황을 만회할 소재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토 웜비어는 오바마 행정부 말기부터 북한에 억류돼있었던 것이니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전임 정권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나는 해결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 이번에 석방된 3인 중 한 명은 실제 오바마 정권 때부터 북한에 억류돼 있던 상태였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들의 석방이 냉랭해진 미국 내 대북여론을 일거에 호의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결정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북미대화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억류됐던 미국인들의 귀국 직후 북미정상회담을 공식화했다는 것은 그래서 주의 깊게 볼 대목이다.

9일 오후 11시 20분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좌)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자료 사진. (청와대 제공/연합뉴스 EPA)

애초 북미정상회담의 장소가 논란이 된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뭔가를 요구하고 미국이 그것을 들어주는 형태인 북미정상회담의 구도상 개최 장소가 평양으로 정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합의가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가까워진다. 만일 북미정상회담이 우리 정부의 권유대로 판문점에서 열렸다면 비핵화 이후의 평화체제 구축 논의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에서 또 다른 긍정적 전망을 가능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라는 ‘중립국’의 위상은 아직은 낙관도 비관도 모두 가능한 상태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일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북미정상회담의 싱가포르 개최는 북미대화를 둘러싼 워싱턴 내부의 상반된 기류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존 볼턴 백악관 NSC보좌관 등은 북미정상회담의 평양 개최 등의 결과가 북한에 협상의 주도권을 넘기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경고’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 역시 존재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미정상회담의 5월 개최를 공식화하면서 각료 및 주변 참모들에게 “거봐라, 대화가 이렇게 좋은 거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걸로 알려져 있다. 이런 맥락을 볼 때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중간선거나 재선 등을 의식해 북미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싶은 의지가 강하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결국 북미정상회담의 키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에 달린만큼 이는 긍정적이다.

물론 시작이 좋다고 해서 끝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6월 12일 이뤄지는 북미정상회담에서 극적 합의가 도출되더라도 비핵화와 보상의 관계로 보면 여전히 암초가 도사리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미국과 북한이 이른바 ‘빅뱅식 접근’으로 불리는 일괄타결과 초단기 내 이행이라는 합의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는 2020년까지 비핵화 조치를 완료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을 거란 얘기다.

그러나 이 역시도 미국이 무엇을 요구할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언론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의 PVID란 표현에 주목해왔다. 이는 기존의 CVID와 다를 바 없다는 해설에도 불구하고 굳이 C를 P로 바꾼 이유가 있을 거라는 점에서 여러 추측이 제기되었다. 어쨌든 CVID보다는 더 강한 기준을 들이댄 것이 아니냐는 건데 존 볼턴 NSC보좌관이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전반의 폐기 등을 언급한 것도 이 맥락 안에 있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최근 아사히신문이 미국이 북한의 핵공학자들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방안까지 언급했다고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북한이 현재의 핵능력을 폐기하는 것을 넘어 미래에 재건할 가능성까지도 포기할 것을 미국이 요구하고 있고 그게 바로 P(Permanent)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잖아도 폐쇄적 사회인 북한 입장에선 자국의 시민을 임의로 해외이주시키는 것은 결단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최근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와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언론과 라디오 인터뷰 등에서 미국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빅뱅론자’와 ‘검증원리주의자’들의 대립을 언급한 바 있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 과도한 검증 기준을 들이대면서 끝없이 “기준에 미달한다”며 비핵화를 실패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어떤 음모론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민주당의 클린턴, 오바마 행정부와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는 모두 북핵문제 해결에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러한 ‘정치적 책임’의 문제가 현존하는 상태에서 ‘정치적 아웃사이더’로 규정되는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문제의 해결에 근접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 내 전문가들과 주류 정치인들을 모두 ‘검증원리주의자’에 가깝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우리는 속고 있다”는 현대 정치의 냉소주의적 어법에 불을 당길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북미정상회담은 그 성공 가능성을 예감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살얼음 걷기’처럼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더욱 북한과 미국 양쪽에만 책임을 미뤄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패권이 아닌 비핵화 자체에 집중하도록 중국을 설득하고 안심시키는 역할의 일부도 한국 정부가 맡을 수밖에 없다. ‘운전대’는 여전히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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