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유죄 유전무죄, 재벌불패, 삼성공화국. 5일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보면서 세간에 요동친 단어들이다.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던 때부터 우려하던 재벌의 ‘3·5 법칙’이 현실화된 것이다. 2심 재판을 맡은 정형식 판사는 중형을 요구하는 민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1심에서 유죄로 인정된 부분들을 거의 전부 무죄로 판단하며 이재용 부회장을 풀어줬다.

박영수 특검은 즉각 반발했다. 특검은 “편파적이고 무성의한 판결”이라는 말에 국민을 대신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특검은 재판부가 무죄로 판단한 혐의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 이유를 제시하면서 상고할 것을 예고했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부정한 청탁, 재산국외도피 혐의,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독대 등 증거가 명백한 데도 모두 무죄로 자의적 판단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특검과 민심이 특히 강하게 반발한 것은 재산 국외 도피 혐의에 대한 2심 재판부의 판단 부분이다. 이는 곧바로 패러디를 양산하게 됐다. 2심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재산 국외 도피 의사가 없다. 단지 장소가 외국”이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내놓은 것 때문이다. 특검도 이에 대해서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논리”라면서 강하게 비판했다.

시민들은 기사 댓글과 SNS 등을 통해 즉각 법원의 비논리와 비상식에 반응했다. “음주운전 할 의사 없어, 다만 장소가 운전대 앞” “주거 침입 의사 없어, 단지 장소가 남의 집” 등등 2심 재판부에 대한 분노를 풍자로 담아냈다. 개그 대본인지 판결문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반응이 무리도 아닌 것이다.

또 그런가 하면 각종 커뮤니티에는 ‘▶◀[謹弔] 대한민국 사법부’ 머리말을 붙이는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그런 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짤막하게 “재판인가 개판인가”라는 댓글이었다. 구구절절 비판하기도 하찮다는 이 댓글에 사법농단의 논란에 서 있는 사법부의 현실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를 일이다.

정형식(57·사법연수원 17기) 서울고법 부장판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처럼 패러디 봇물이 터진 것은 그만큼 사법부의 판결이 비상식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판결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최근 상영한 영화 ‘1987’이었다. 고문으로 대학생이 숨지자 경찰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했었다. 언론과 국민을 무시해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던 군부독재의 오만이 그대로 담긴 한 장면이었다.

그 후로 30년이 지난 지금, 경찰도 아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법원이라는 곳에서 “재산 국외 도피 의사가 없다. 단지 장소가 외국”이라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내고 있다. 이 판결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와 얼마나 다를지 분간하기 어렵다.

시쳇말로 개가 웃을 일이 법원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시민들의 심정은 참담하다 못해 비참할 지경이다. 법원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두려움, 존경심을 갖고 있다면 아무리 풀어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엉망진창인 논리까지 내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검 수사가 자주 법원이라는 걸림돌에 걸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했던 기대와 신뢰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확실하게 알려준 판결이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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