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추노와 신데렐라 언니의 성공으로 수목드라마의 지존 자리를 지키고 있는 KBS로서는 이런 상승의 분위기를 이어가길 원했을 것이고 중견 배우들과 신예들이 어우러진 출연자들의 면모도 그런 기대치에 부응하기에 충분했었죠. 전광렬과 전인화, 정성모가 포진한 쟁쟁한 베테랑들에 비해 드라마 전면에 나설 젊은 연기자 층의 무게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하이킥의 신예 윤시윤의 정극 연기도전과 오랜만에 수목극의 전쟁 중심으로 돌아온 유진의 성공 여부도 흥미 있는 관전거리였구요.

하지만 이런 모든 기대감, 흥밋거리들은 단 한 회 방송으로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냥 막장. 아무리 벗어나려 노력하고 색다른 재미거리나 장점을 추구하려 노력한다고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낙인을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꽝 찍어버렸거든요. 제빵이라는 특이한 소재, 주인공의 신분 상승이라는 익숙하지만 몰입도가 강한 스토리라인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제빵왕 김탁구는 결국 막장이 될 수밖에 없어요. 너무나 안이하게,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오물통을 스스로 뒤집어써버렸으니까요.

무엇이 막장이냐구요? 남아 선호사상과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집착이 만든 부잣집의 치정극이 출발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돈과 욕망이 뒤엉키는 잘사는 집 사람들의 일대기야 잘만 활용한다면 충분히 흥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겠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교묘한, 아슬아슬한 욕망의 줄다리기까지 나아가기보다 그냥 출생의 비밀, 핏줄의 당김이라는 구태의연하고 억지스러운 배경을 깔아 놓으면서 앞으로 모든 스토리라인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버렸어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놈의 혈연이 등장할 것이고 모든 갈등과 해결의 이유로 작용할 것입니다.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도, 납득할만한 설명도 필요 없는 만능장치가 되어 버릴거에요.

당연히 녹록치 않은 김탁구의 제빵왕으로의 앞길이 시시해 보이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노력보다, 어떠한 천부적인 재능보다 그저 핏줄이 최고의 가치이자 능력이 되어 버리는 이런 설정만큼 억지스럽고 허탈한 것이 또 있을까요? 굳이 힘들게 도전하고 발전을 위해 매달릴 필요 없이 그는 그냥 그렇게 태어난 순간부터 승리할 운명이었다는, 그가 차지하는 것이 당연했던 자리로 복귀하는 것뿐이에요. 그 어떤 억지 설정보다도 위험한, 될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다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운명론이 지배하는 드라마에서 어떤 희망도 즐거움도 기대할 수 있을 리 없죠.

그러니 처음 등장하며 그 자세한 윤곽만을 그리고 있는 작품에게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막장이란 호칭을 부여할 수밖에요. 앞으로 툭하면 반복될 그놈의 내 핏줄, 우리 새끼, 알고 보니 우리는 배다는 남매 타령이 뻔히 보이니 한숨만 나오더라구요. 이렇게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출생의 비밀을 내세울 바에야 그 소재는 제빵이 아니라 미용, 정육, 축산, 양잠이어도 상관이 없었을 겁니다. 그저 그 안의 치정극과 혈연 되찾기를 꾸미기 위한 허울에 불과한 전문직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게 차라리 어울리는 이름은 내 새끼 김탁구가 나을 뻔 했어요.

그러고 보니 이런 식의 출생의 차이, 태생적인 우월함을 은근히 과시하는 드라마를 자주 접하게 되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네요. 더 이상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세상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불평등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용인하고 오히려 미화하는 내용의 작품들을 사회의 공공 가치를 선도하고 홍보한다는 이른바 공영 방송에서 반복해서 접한다는 것도 조금 짜증나구요. 정말로 바른 세상을 위해 퇴출해야 할 것은 막말 방송인이나 정치적 색채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이런 불건전한 시각을 담고 있는 드라마일 텐데 말이죠.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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