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아수라>라는 영화가 인기였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아수리언’들이 SNS 등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에 항의하고 하야와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영화 속의 가상적 공간인 안남시와 관계된 깃발을 들고 나타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들이 그런 형태로 촛불집회에 등장한 것은 필연이었다. 완성도와 관계없이 인기를 얻는 영화에는 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징표 같은 것이 들어있다. 영화 <아수라>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미리 막거나 되돌릴 수 없는 예정된 파국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정치는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다. 신분상 경찰이지만 사실은 소시민의 삶이 투영돼있는 주인공은 영화 내내 정치에 속고 이용당하며 우왕좌왕하다가 배신당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검사로 인격화한 ‘법’ 역시 주인공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법적 정의의 추구라는 최소한의 대의가 존재한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 가서 관객이 보는 것은 그런 알량한 대의를 내세운 ‘법’마저도 ‘정치’의 힘에 별 수 없이 굴복하고 만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소시민의 눈앞에 우연히 떨어져 있는 총의 탄환 하나이다. 이 정도도 영화니까 가능한 얘기다. 현실의 소시민이 그런 총 같은 것을 손에 넣기란 대단히 어렵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대개 이런 처지다. 이런 현실인식은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성체제가 요구하는 대로 충실히 따라왔고 그들이 요구하는 경쟁에서 적어도 평균 이상의 성과를 늘 내왔지만 ‘정상적 삶’을 쟁취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이다.

‘나’는 갖추지 못한 조건을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 ‘금수저’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경쟁에서 승리하고 그걸 당연한 것인 양 한다. 그러나 ‘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사실 ‘불량품’에 불과하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소셜미디어에 “돈도 능력이야”라고 쓴 것에 다들 분노한 이유는 이런 인식이 현실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부조리에는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대통령까지 가세했다.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온갖 우여곡절 끝에 쟁취하더라도 기성세대의 갑질과 꼰대질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다. 젊은 세대의 일부가 가상화폐 투기를 ‘마지막 기회’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느 회사원이 가상화폐 투자로 돈을 벌고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어깃장을 놓고 당당히 회사를 그만뒀다더라는 스토리가 각광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남의 눈치 안 보고 스스로의 존재에 만족하며 당당한 삶을 살기 위한 궁극적 목표는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되는 것이다.

최근 젊은 세대가 관심을 갖는 주제에 대한 인터넷 상의 반응 대부분에서 이런 현실인식은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어떤 자들이 조금의 노력도 없이 부당하게 성과를 가로채고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 ‘대의’는 피해를 본 ‘우리’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최종적으로는 그 대의를 내세운 사람들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게 이 부조리의 결말이다. ‘우리’는 그저 속고 이용당하고 배신당할 뿐이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를 놓고 누구는 노력해서 정당하게 취득한 지위를 누구는 정치적 이유로 실력도 없으면서 부당하게 가져간다고 여긴다. 같은 인식이 초등 교원 임용절벽 문제를 둘러싼 갑론을박에서도 나타났다. 최근에는 평창동계올림픽의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문제가 이런 인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구도 속에서 비정규직과 교대 학생들, 이화여대에 입학한 마장마술 선수 정유라, 북한 김정은 정권을 비롯한 정치 일반은 그저 ‘숟가락을 얹는’ 존재이며 떼를 쓰고 ‘남 탓’이나 하는 것들이다.

북한 예술단 사전점검단을 이끌고 방남한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이 21일 오후 강원도 황영조체육관을 둘러보고 있다. (통일부/연합뉴스)
지난 2017년 강릉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디비전Ⅱ 그룹 A 대회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일부 정치권과 언론 및 지식인들은 이런 세계관에 사로잡힌 이들을 오직 꾸짖으려 들지만 왜 세상이 이렇게 돼버렸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극히 한정돼있는 현실 속에서 경쟁의 원리는 이미 사회 구성원들 전체에 내면화돼있고, 경쟁에서 탈락한 이는 그저 그에 맞는 대접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이미 공리가 되어 있다. 칼럼니스트 박권일 씨는 과거 그런 세태를 ‘타락한 능력주의’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는데, 이런 체제를 만들고 또 이런 인식을 부추기는 것은 이 세계를 움직이는 기득권이고 이에 부역하는 정치이다.

그래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문제는 문재인 정권 입장에선 빠져 나갈 수 없는 함정이다. 비난에 의한 타격을 피해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단일팀 구성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다. 단일팀 구성은 모든 대화 제의를 거부하는 북한을 평창동계올림픽에 끌어내기 위해 제시한 여러 당근 중 하나이며 또 과거 정권에서도 모색된 고전적인 해결책이라는 설명은 위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겐 그저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한 부조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변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가장 큰 곤혹스러움은 현실적 어려움으로부터 촉발된 다수 대중의 반응을 보수정치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보수언론은 연일 문재인 정권의 당국자들을 친북적 세계관에 갇혀 대화를 향한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혀 평창동계올림픽이라는 마약에 취해있는 사람들로 표현한다. 21일과 22일에도 경호를 맡은 국정원 요원과 공연장 점검에 동행한 당국자의 말 한 마디를 꼬투리 잡아 북한을 상전으로 떠받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처럼 묘사했다. “1년 전에 연락을 주셨더라면…, 너무 갑자기 연락을 주는 바람에 새로 (시설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는 우리 측 인사의 말은 아부가 아니라 오히려 가시를 담은 말이다. 우리 정부의 반복된 대화 제의를 그동안 모른척 한 것은 북한이기 때문이다.

대북문제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평창동계올림픽은 시작일 뿐이다. 오히려 그 이후 국면이 훨씬 어렵다. 보수언론은 바보 취급을 하지만 문재인 정권도 이걸 모르고 있지 않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코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여당에 불리한 이슈로 작용할 것이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정권심판론을 향한 인력이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대북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난국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보수정치도 이것을 알지만 당장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더 급급하다.

풀기 쉽지 않은 문제지만 시선은 근본을 응시했으면 한다. 결국 <아수라>의 세계 그 자체와 싸우지 않으면 이런 일은 소재만을 달리해서 반복될 것이다. 이를 중단하기 위한 대안적 정치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여의도 정치는 그것과는 별 관계없는 일만을 반복하고 있고 언론은 열심히 이를 뒤쫓으며 지금의 질서를 강화하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선가부터 끊어야 한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자면 여전히 실마리는 정치와 언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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