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근로’라는 말을 오래 전부터 쓰지 않는다. 논문이나 잡문 어디에서나 그렇다. 쓸 이유가 전혀 없다. ‘근로자’는 적확한 현실인식을 오히려 방해한다. 왜곡과 오용의 언어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왜 ‘일하다’라는 노(勞) 자 앞에 ‘열심히’라는 뜻의 근(勤) 자가 붙는지 의심해보자고 주문한다. 노동자면 ‘노동자’이지 무슨 ‘근로자’인가? 영어사전에 ‘hard worker'라는 게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라. 사회과학의 기본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런 이념적 가치 잔뜩 배어든 언어는 피하는 게 맞다. 대체 왜 저런 개념이 탄생하고 통용되었는지, 그 정치경제적 배경과 사회역사적 유래를 살펴봐야 한다.

왜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인가? 어떻게 해서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가 되는가? 언어와 실재의 조응이 순리다. 기표와 지시대상이 일치하는 사회가 진보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의 헌법 개정 논의의 와중에, 조문상의 ‘근로자’를 ‘노동자’로 대체 표기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건 매우 의미가 크다. 1948년 제헌헌법 때부터 대한민국 헌법은 ‘근로’와 ‘근로자’, ‘근로조건’이라는 용어를 채택해 왔다. 그러면서 이들 언어의 사회적 통용을 정당화시켰다. 포스트 촛불혁명의 시대, 한국사회는 이 상(투적 지)식을 래디컬하게 정정코자 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셈이다.

지난해 9월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과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등 특수고용직 노조원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특수고용직의 노동3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그런가? 잠깐만. 그래서 언어를 실재와 정확히 일치시키면, 모든 문제는 말끔히 정리가 되는가? 그러면, 현실의 모든 노동하는 자들은 마침내 ‘노동자’로 인정받아 현시하고, ‘노동자’는 주변의 모든 노동하는 삶들을 소외 없이 표현하게 되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뼈아픈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2018년, 한국에서 다수의 인간들은 멀쩡히 매일같이 노동에 시달리고 임노동자로 생활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에 노출되면서도, 당장 노동자가 되지 못한다. 법적으로, ‘근로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설혹 헌법조문이 ‘근로자’에서 ‘노동자’로 바뀌더라도, 노동자로서 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른 변화가 없으면.

학습지 교사들이 그러하다. 택배 기사들이 그렇다. 간병인, 대리운전 기사들도 다르지 않다. 이들 ‘특수 고용직’은 모두 현재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다. ‘근로자’로 분류되는 대신에, ‘개인 사업자’로 간주된다. 설혹 여타 ‘근로자’들처럼 채용공고 등을 거쳐 노동자가 되고 또한 특정 회사를 위해 일하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받더라도, 그들은 결코 노동자가 될 수 없다. 똑같이 저임금에 시달리는 이들이 고용보험 등 4대 보험의 보호를 못 받는 건 당연. ‘개인 사업자’로서 자신이 직접 상당히 높은 액수의 의료보험을 부담해야 한다. 그걸 감당 못하는 상당 수 열세의 ‘개인 사업자’들은 당장 의료보험 사각지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나도, 산재처리가 안 된다. 부당하게 계약해지가 되어도, 당사자는 물론 누가 뭐라 도와주지 못한다. 엄연한 사업자들끼리의 계약이니까. 생활의 고난이 따르고 신체의 위험이 도사린 불안상태는 필연적. 생명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 1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방송작가의 신세가 정확히 그러하다. 구성작가. 능력을 갖춘, 하지만 경제력은 부족한, 젊은 여성들로 주로 구성된 직업군이다. 반짝 반짝 아이디어가 빛나고, 글쓰기 능력과 창의력이 돋보이는 노동의 존재들. 그들 없이 방송제작현장은 한 마디로 당장 중지. 그런 그녀들도 법의 실정에서는 언제든지 해지 가능한 ‘특수 고용직’, ‘개인 사업자’일 뿐이다.

2016년 방송작가유니온이 노동절을 맞아 방송작가들이 직접 말하는 노동환경, 개선하고 싶은 노동환경에 대한 목소리를 담은 인증샷들을 모았다. [사진제공=방송작가유니온]

갑을지배구조에 종속된 방송사 내·외부 이 병의 ‘사업자’들은, 보도·교양·오락 구분 없이 방송 프로그램 제작현장의 핵심 당사자다. ‘작가가 다 써준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녀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의 가치, 노역의 진면목을 압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근로자’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로 보호받지 못한다. 설혹 그들이 자신의 노동자성을 강력히 인식하고 주창하더라도, 그녀들이 이를 기초로 노동조합을 결성코자 해도, 그래도 이들 ‘특수 고용직’에게 붙은 ‘개인 사업자’의 법적인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방송구성작가들의 노동(자) 현실을 법제도적으로 거부한다.

촛불혁명 이후,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현실에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노조 설립을 포함한 특수 고용직의 노동3권 보장을 강력히 권고하고 나섰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이를 공약으로 밝힌 바 있는 문재인 정부가 수용 입장을 밝힌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현행 노조법에 따라 특수 고용직의 노동자성 여부는 아직까지 개별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인데, 과연 관계법 개정이 조만간 이루어져 택시 기사 등 ‘개인 사업자’화한 전국 230만의 비정규직들이 진정 노동자로 인정받아 합법 노조를 설립할 수 있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성작가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코너 담당 서브 작가와 흔히 ‘막내’라 불리던 보조 작가 그리고 협회 비소속의 작가들을 주축으로, 자신의 노동자성을 인식하고 부당노동환경을 개선코자 하는 사람들이 뭉친 ‘방송작가유니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작년 11월 11일에는, 마침내 전국언론노동조합 산하에 방송작가지부가 출범한다. 방송 작가 또한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임을 인식”한 자들의 당당한 노동자 선언이자 노동조합 발표였다. 노동자의 움직임은 이들을 ‘근로자’로서조차 인식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 법제도의 낡은 관행을 늘 앞지른다. 그 혁신의 운동을 방송현장에서 글 쓰고 아이디어 내는 노동자들이 선취한다.

2017년 11월 1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출범식이 열렸다. [사진제공=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우리의 처우개선과 노동권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출범 선언문이 발표된다. 작가들은 “다른 노동자들과의 끈끈한 연대를 통해 방송계에 만연된 불공정 관행을 타파”하고 “노동 인권 침해를 근절”하는 데 힘쓰겠다고 의지를 밝힌다. “방송 콘텐츠가 방송작가 및 비정규 노동자들의 눈물로 제작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는 비장한 결기다. 자신을 당당히 ‘노동자’로 호명한 시사교양·드라마·예능 분야 150여 명의 조합원들은, “불공정한 노동 환경을 넘어 노동 인권이 보장되는 방송 환경을 구축하는 승리의 역사를 집필해 나갈 것”을 약속한다. 방송작가들의 당당한 노동자 되기.

그리고 불과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노동자로 나선 작가들은, 그리고 이들 작가-노동자와 함께하기로 한 언론노조는, 이 변화를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 테스트하는 중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방송작가를 포함하는 병들의 스태프를 대상으로 한, 방송사 내부 갑을질의 문제가 충격적으로 폭로되면서다. 상품권으로 ‘페이’를 대신하는, 노동자를 ‘사업자’로 묶는 케케묵은 관행의 적폐를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병들의 내부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공분은, 작가 등 스태프들의 노동인권을 옥죄는 적폐의 관행을 이번 기회에 반드시 끊으라는 사회의 여론과 합세해, 강력한 민원을 구성 중이다.

이에 맞춰, 작가 스태프들의 노동(자)권을 법·제도적으로 구현해내는 게 관건. “방송사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사의 제작 현장에 어떤 불공정 관행, 차별, 불법 사항들이 있는지 점검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모든 방송ᅠ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언론노조가 성명을 내놨다. 기대가 모아진다. 답이 문제. 언론노조와 언론노동자들은 과연 노동주권을 요구하는 하위 병들 주체의 봉기에 연대해 차별·불법·불공정의 체제를 아래로부터 깨트려줄 것인가? ‘사업자’, ‘근로자’ 아닌 방송 노동자들의 인권선언을 행동으로써 함께 책임질 텐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