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미디어행동은 4월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공영방송 국민컨설팅 보고서 발표회'를 개최했다. ⓒ곽상아
지난 4월29일 미디어행동은 ‘공영방송 국민컨설팅 보고서’ 발표회를 갖고 국회에 ‘수신료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주문했다. 국회의장 직속 기구로 하되 독립성을 보장하고 공영방송 재원 안정화를 위한 수신료 산정, 수신료 조사기관 설립과 구성, 지역분권화를 고려한 각 방송사의 수신료 배분 결정, 공영방송별 투명한 예.결산 집행과 재원 운용을 위한 감시.감독 수행 등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했다.

미디어행동이 수신료위원회를 국회에 설치하자고 제안한 이유는 간단하다.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재원 안정이 이뤄져야 하므로 재원 당사자인 국민을 대의하는 국회에 기구를 두어 감시.통제(관리.감독)하는 게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KBS는 제 일이 아닌지라 코멘트할 일이 없을 테고, 정치권은 지방선거로 바쁜지라 논의에 부칠 엄두를 못내고 있다. 최시중 위원장이나 김인규 사장은 현행 법대로 하면 될 일이라며 살펴보지 않을 게 뻔하다.

수신료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연주 전 사장 재직 당시에도 현행 수신료 산정 방식의 문제점 지적이 잇따랐다. 우상호 전 열린우리당 의원은 “수신료를 방송위원회로 이관하고 수신료의 자의적 결정을 막기 위해 법률로 배분요율을 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정연주 전 사장은 “수신료를 관리하는 기구를 별도로 두는 것은 자칫 독립성에 심대한 위협을 가져올 수 있고, 또 다른 옥상옥이 될 수 있다”며 수용하지 않았다.

노웅래 전 의원이 ‘공영방송수신료위원회’를 제기한 데 대해서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연주 전 사장은 “지금 KBS는 여러 가지 그런 장치가 다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투명하고 공개적인 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요. 그래서 지금 숨기는 것 감추는 것 하나 없습니다. (수신료위원회는) 자칫 옥상옥이 되기가 쉽습니다. 저는 투명한 경영과 제대로 된 예산 집행에 대한 감리감독은 저희가 가지고 있는 감사실 기능 그리고 이사회 기능을 강화한다면 충분히 그것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라고 응대했다. 정연주 전 사장은 최고의결기관으로서의 이사회가 독자적인 감시를 할 기구로 충분하고 기능 강화를 위해 사무국도 설치했다며 문제없다고 장담했다.

공영방송발전을위한시민연대(공발연)이 2006년 5월 KBS를 상대로 경영정보공개청구 행정소송을 냈다. 3년간 장르별 제작원가와 외주제작 내역, 이사회 의사록을 공개하라는 청구였다. 서울고등법원이 2008년 1월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KBS가 상고를 했고, 2008년 5월 대법원은 기각 판결해 일단락됐다. 공발연이 KBS가 공개한 자료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송사에 소모된 에네르기를 생각하면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제작비나 이사회 회의록 같은 건 공개가 기본이고, 정말 불기피할 경우 납득할 만한 해명과 함께 제한적으로 다루면 될 일인데, 불행하게도 이 소모적인 공방이 재연될 조짐이다.

매사 얼마나 비밀스러운지, 미디어행동은 ‘공영방송 국민컨설팅 보고서’를 발표하던 날 수신료 사용 내역 등 KBS에 12개 항목, 한전에 1개 항목의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KBS가 3주간 준비해서 보내온 자료는 대부분 일반현황 자료 수준으로, 프로그램 저작권 소유 현황이나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컨설팅 내용 등 알맹이 자료는 공개할 수 없다고 회신했다.

과거 수신료위원회 제안이나 정보공개청구 사례는 단지 하나의 사례였을지 모른다. 공영방송 KBS 운영에 있어 정연주 전 사장이 가진 자신감과 철학에 비하면 사소한 해프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 집단이 공영방송을 장악한 순간 개혁적인 것의 모든 게 허물어졌다. 허물어졌을 뿐 아니라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식겁을 당하게 되었다.

헤르난 발데즈(Herman Valdez)와 아르만드 마틀라(Armand Mattelart)는 1973년 쿠데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Culture and Mass Media. 1975 - ViVe TV의 캐서린 아라우호가 풀어서 말함)

“좌파의 실수는 민중이 정치적 소통의 주도권을 잡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물을 혁명의 행위자들이자 소비자들인 노동자들에게 넘기는 데 충분한 확신이 없었다. 좌파의 소통 계획은 수치스럽게도 수세적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정적들이 만들어낸 집단적 표현물들과 씨름했으며, 적대적 계급의 순환 논리의 덫에 빠져 있었다. 담론의 시작이 항상 반동주의자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고, 공적 소통의 장을 담당했던 전문가들은 ‘스스로를 제거’하고 새로운 문화 흐름의 씨앗을 창조할 만큼 기민하지 않았다. 이 경우에 기술적인 ‘중립성’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되는 오류로 판명되었다. 우파나 좌파 모두가 원한다면 활용할 수 있는, ‘그러한 이미 존재하는’ 방법론 같은 것은 없었다. 부르주아적인 소통 방법만이 있을 뿐이었다. 민중은 스스로의 소통방법을 창조해야 했으나 그 가능성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반성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공영방송에 대한 시민의 참여와 민주적 감시.통제의 방안을, 스스로의 소통방법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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