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정치를 소재로 한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에는 참모를 선거에 출마시키는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연설문 작성을 담당하는 선임 비서관 역으로 극의 중심을 이끌었던 이 참모는 대통령의 지지 발언에도 불구하고 낙선하면서 퇴장했다가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등장한다.

‘웨스트윙’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좋아했던 드라마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도 언론은 이 드라마의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 위반 논란에 휘말린 상황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한미 정치문화와 제도의 차이를 시작으로 선출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복잡한 논의가 뒤따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한 행위는 드라마 내용처럼 특정 참모를 선거에 출마시킨 후 이에 대한 지지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의 대통령발 정계개편을 통해 만들어진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다수가 돼야 국정 운영이 제대로 뒷받침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에 불과하다. 단지 그런 발언에 불과했음에도 국회는 탄핵을 추진했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앞장섰다.

28일부터 이어진 보도를 보니 정작 ‘웨스트윙’의 에피소드를 재현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었던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가 입수한 이명박 정부의 문건에는 “퇴임 후 안전판” 운운하며 청와대 참모들을 선거에 출마토록 하고 이를 지원하기로 한 사실이 드러나 있다. 당시 지원 대상으로 언급된 인사 중에는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으로 전임 정부의 불법행위에 대한 수사를 물타기 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의 이름도 있다.

공무원에게 정치적 중립을 어느 범위까지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좀 더 고민해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행위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공작정치’의 문제에 가깝다.

이 문건을 생산한 주체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의 감찰팀이다. 이들에 대한 선거 지원이 공무원 조직을 쥐락펴락하는 ‘공작’의 방식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신들이 믿는 정치적 노선에 대한 지지를 떳떳하게 호소하는 게 아니라 청와대 내에 일종의 민원창구를 만들어 권력을 활용해보려고 했다는 정황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은 ‘정치보복’ 프레임만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 정진석 의원은 “적폐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정치보복을 자행하고 있다”, “보수우파의 씨를 말리려는 속셈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노골화하는 것은 자유한국당의 본질을 흐리려는 기도이다. 정진석 의원이 참여정부 시기 각 부처의 입장을 인터넷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을 “댓글을 달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으로 단순화해 공격의 도구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 평가를 벗어나기 어렵다.

자유한국당의 이런 대응은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그럼에도 자유한국당이 ‘너나 나나 똑같이 더럽다’는 식의 프레임을 재생산하는데 골몰하고 있는 건 별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름의 계산이 있어서일 것이다.

예를 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아직도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서다. 다음달 16일로 예정된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만기가 다가오고 검찰이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요구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불구속 수사’의 필요성을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친박계 의원 10여명은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불구속 수사 하라는 요구를 공개적으로 내놨다.

박근혜 정권의 여러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두 가지 논리로 지탱하고 있다. 첫 번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잘못을 하긴 했으나 그 정도의 잘못은 과거 민주정부도 똑같은 수준에서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에 이르게 된 것은 현재의 집권세력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정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한 결과라는 것이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적폐청산’에 대응하는 논리가 정확히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법적인 조치의 대상이 되고 이것이 핵심 지지층의 실망과 외면으로 이어진다면 자유한국당 입장에서 내년 지방선거는 치르나 마나일 것이다. 피해를 최소화 하려면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논리 중 가장 대중적 위력이 있을만한 것을 이번 추석 밥상에 올려야만 한다. “민주정부도 똑같이 더럽다”는 주장은 자유한국당 자신들이 할 때에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해 보이겠으나 추석 밥상에서 재생산될 때에는 꽤 그럴듯한 말처럼 포장될 것이다.

함께 볼 것은 이번 추석 밥상에 오를 또 하나의 주제가 ‘보수통합’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른정당은 자유한국당과의 통합 논의에 대한 입장을 놓고 그야말로 붕괴 직전의 상황에 처해있다. 바른정당 최고위원을 맡고 있는 김영우 의원 등이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과 회동을 통해 통합추진위 등을 구성하기로 한 사실이 공개되자 유승민 의원을 비롯한 ‘자강파’들은 그야말로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유승민 비대위 구성 실패 이후 11월 전당대회에서 당의 진로를 결정할 새 지도부를 선출하기로 했음에도 현재 시점에서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실질적으로 논의할 단위를 꾸린 것은 명분이 없다는 게 이들 주장의 핵심 내용이다.

명분이 없는 일을 굳이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추석 전에 최소한의 틀을 만들어야 명절 기간 동안 여론의 움직임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된다. 여론의 반향이 있다면 명절이 지난 이후엔 격렬한 진로 논쟁이 진행될 것이고 11월 전당대회는 바른정당의 분당과 와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보수정치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다수는 보수정치의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은 보수정치가 지리멸렬한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바른정당이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들은 무망한 보수혁신에 기대를 거느니 차라리 통합해서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길 요구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문재인 정권에 갖는 불안감과 미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런 정서는 강화될 수 있다. 보수정치의 통합을 위해선 과거 보수정권의 여러 흠들은 용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이번 추석 밥상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섬뜩하다.

특정 세력의 정치적 유불리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결국 정치가 “똥 묻은 개와 싸우는 똥 묻은 개”라는 냉소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라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게 정치 자신이라는 점은 그야말로 자해적 코미디다. 자유한국당의 끝없는 ‘남탓’은 당장은 이익으로 돌아올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정치 그 자체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 이렇게 두고 볼 것인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