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유성호 오마이뉴스
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학생은 공부를 못했다. 아니, 공부를 아예 안했다. 그는 자신이 왜 꼭 대학에 가야하는지에 대한 회의와 의문에 빠져있었다.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판단할 틈도 주지 않고 무조건 밤새워 공부해 좋은 대학 갈 것을 강요하는 학교와 사회의 질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볼 때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으로 꽉 짜여진 학교 생활이란 기계 같은 사회의 부속품을 양산하는 공장에 불과했다. 그는 스스로를 자발적 불량품이라 불렀다. 불량품이 돼서라도 기계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싶었다.

그리고 한 대학교 신입생이 있었다. 그는 세칭 ‘삼류대’에 입학했다. 재수까지 하며 명문대학을 가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한 그는 원치 않았던 학교의 학생이 된 스스로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같이 입학한 동기들이나 선배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입시 준비 때 비슷한 성적이었다가 명문대에 입학한 고교 시절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들이 어느 학교 입학했느냐고 물으면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사뭇 상반되어 보이는 위의 두 젊은이는, 실은 동일 인물이다.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의 창피한 20여년전 이야기다. 세상에서 강요하는 질서를 거부하고 싶어했던 10대의 ‘나’는 결정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길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뒤늦게 입시 전쟁에 뛰어들었고 개인적 노력 덕분에 성적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마지막 관문에서 ‘승자’가 되지 못하고 (수능세대들에게는 낯선 단어인)후기대학에 입학해야 했다. 불과 2년 전에 나름 진지하게 했었던, 강압적 사회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고민을 오직 승자와 패자만 존재하는 전쟁 같은 입시 준비 과정에서 까맣게 잊어버렸고 그저 대학 간판을 통한 스팩 쌓기에 연연하는 젊은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한국사회가 세월이 지나도 변치않고 청소년들에게 입시전쟁을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승자독식과 서열화의 구조를 온몸에 학습시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못가면 소수를 제외하고는 평생 열패감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설사 대학에 간다고 하더라도 서울대를 정점으로 촘촘히 매겨지는 서열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엄연한 현실이다. 실제로 하위권 대학으로 분류되는 모교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했던 말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는 전공 공부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어. 어차피 나중에는 치약이나 팔러 다닐테니까.” 영업직에 대한 비하가 섞인 표현이어서 조심스럽긴한데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선배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래서 학교를 옮길 생각을 수차례 했었다.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이후 실제로 다시 대입 준비를 잠시 했던 적도 있다. 겉으로는 진보 좌파 청년 행세를 하고 다녔지만 내면에는 ‘스팩’내지 ‘간판’에 대한 욕망과 학벌 콤플렉스를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런 내면적 갈등에서 20대 내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갈등이 결코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예전에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았던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해 보니 한국 사회의 학벌 골품제는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견고하고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상대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주류 사회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집단 안에서도 간판 따지기는 엄연히 존재했다. 진보를 표방하는 문화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할 때 겪었던 일인데, 학교 다닐 때부터 존경해마지 않던 진보적 학자와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 일이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학생 때 그 분 책으로 후배들과 세미나를 했었던 얘기가 나왔다. 그 분이 반갑게 물어왔다. “어느 학교 나왔어요?” 자연스럽게 내가 나온 학교 이름을 얘기하니 약간 당황한 표정과 함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학교에서도 내 책으로 세미나를 하는군.”

뭐 어느 시점이 지나면서 학벌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자유로와지기는 했다. 이것은 다분히 의식적으로 노력 했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학벌 따위가 별로 중요치 않은 동네에서 주로 놀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또한 학벌주의를 넘어 대학을 중심으로 짜여진 한국의 교육 제도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 후반 구제금융기를 거치며 한국 대학은 그나마 억지로 갖추고 있던 품위를 내던져 버렸다. 메이저 캠퍼스를 중심으로 사립대학들에 자본의 침투가 노골화된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한 무렵이다. 서글픈 노릇이지만 아카데미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대학 간판에 대한 환상도 함께 깨지고 만 셈이다.

최근 터져나온 김예슬 씨의 ‘선언’은 대학이란 공동체에 대한 환상과 낭만 따위를 예전에 접어버린 메마른 가슴에 간만에 내린 단비 같았다. 개인마다 입장이 다르고 그녀의 견해에 대한 의견도 다양한 것이 당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열여덟 살에 가슴 깊이 품었던 교육제도에 대한 의혹과 불신에 대한 하나의 답변인 동시에 이십대 시절, 나도 모르게 빠져버렸던 깊고 징그러운 시스템의 늪에 대한 질타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물겹도록 절실한 ‘인간선언’에서, 도처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서열주의를 횡단할 수 있는 희망의 날개를 보았다.

그래서, 이제 아이를 낳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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