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초기부터 꾸준히 꿈을 키워온 노비들의 반란이 드디어 일어났다. 물론 기록에는 인조 때 노비 등 천민의 반란은 없다.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졌던 이괄의 난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업복이 노비당의 반란은 추노의 역사관 속에서 충분히 개연성을 확보한 허구이며, 이 허구를 위해 작가와 감독은 참 오랫동안 묵묵히 노비들의 이야기들을 전개해왔다.

시선의 대부분이 대길과 태하에게 모아질 때, 두 주모를 비추듯이 사소하게 노비당의 결성과 성장을 그려왔다. 잠시 업복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적도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시청자의 관심은 대길과 태하 그리고 천지호 등 꿀 바른 존재감들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눈에 뻔히 보면서도 노비들의 반란은 마치 추노 바깥의 일처럼 혹은 너무 당연한 일처럼 관심의 중심에서 살짝 비켜나있었다.

그래서인지 드디어 디데이를 맞아 각지의 노비들이 총과 칼을 들고 업복이 무리에게 합류하고도 어쩐지 긴장감이 덜했다. 그렇지만 노비당의 '그분'은 거사에 쓰일 돈을 몰래 빼돌려 왔던 윤기원을 처단한 부분에서는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했다. 모두가 목숨을 내걸고 달려야 할 결전의 날을 맞은 이상 배신과 협잡을 묵인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노비당의 '그분'은 눈엣가시였던 윤기원뿐만 아니라 23회 예고를 보면 추노 최고 밉상 오포교까지 처치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된다면 '그분'은 정말 큰 박수를 받게 될 것이다.

봉기하는 노비들의 구호는 큰 소리 한번 내보자는 것이다.

그런 사실은 모르지만 말로만 들어왔던 다른 노비들의 대거 합류로 사기충천한 노비당은 거사에 나서 선혜청 습격을 통쾌한 승리로 장식했다. 보통 사극들이 후반으로 도착하면 중도에 제작비 조절 못해 엉성한 액션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지만, 적절한 규모와 함께 반란의 스펙터클을 잘 그려냈다. 마치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됐는데 BGM이 따로 준비된 것이 아닌 점은 조금 아쉬웠다.

선혜청 습격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부상으로 붙잡힌 동료를 눈물로 저격하고 괴로워하는 업복이와 억지로 시집가야 하는 초복이의 눈물을 동시에 그린 것은 화면을 아낀 압축된 연출이었다. 한편 태하의 마지막 수단인 세자와의 단판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물론 태하만 모르고 시청자는 모두 예상했던 일이다. 게다가 모든 것을 알고 뒤쫓은 철웅들에게 포위당했던 이들을 예기치 않은 노비들의 반란이 대길과 태하를 구했다. 철웅이 동원한 포청 군사가 노비들의 폭파시킨 굉음에 놀라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을 뻔 했던 대길과 태하는 철웅의 포위망을 뚫는다. 이제 남은 것은 철웅에 대한 대길과 태하 두 사내의 원한이 노비당의 봉기와 어떤 연관을 가지며 드라마의 대단원을 장식하느냐에 대한 궁금증뿐이다.

이쯤에서 추노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은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데, 우선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노비의 난이 성공한 예가 없다. 허구의 경우면서 이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그 누구도 체제를 바꾸지 못했으니 노비당의 거사가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어렵다. 게다가 비극 성향이 짙은 곽정환 감독의 스타일 역시 성공보다는 실패의 예측을 가능케 한다.

실패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노비의 반란에 흥분하게 되는 것은 우선 추노의 주제의식에 길들여진 것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 허구의 반란에 진정 동화되는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허구가 공감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숨겨진 욕망을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일까? 추노에 동화되는 우리들의 감춰진 욕망 혹은 불만족은 분노조차 잃은 무력감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로 해서 노비들의 반란에 흥분하게 되고 감정이입을 통해 현실의 카타르시스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동안 추노는 주제의식을 숨기거나 혹은 가려왔다. 그것이 흥행에 대한 강박인지, 제작 환경의 한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허나 이미 가진 자들의 더 갖고자 하는 욕망의 혁명은 지리멸렬한데 반해 사회의 말단의 존재인 노비들이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실패한 혁명 위에 선 것만으로도 성공이나 다름없다.

지나간 역사는 돌이킬 수 없다. 늘 역사는 당대에 가장 강한 완력으로 존재했다. 그 완력 앞에 무력한 현재에 추노가 보여준 반란은 그래서 사실보다도 위대하고 준엄한 메시지를 읽게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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