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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 아베노믹스, 공산당 선전...파편화된 보도, 이유는?

'분석'없는 일본 참의원 선거 보도

2013. 07. 22 by 한윤형 기자

▲ 금일(22일)자 조선일보 5면 기사

흔히들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들 한다. 한편 우리 속담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한국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이웃나라 일본의 정치적 격변기에 대한 신문보도를 보면 이 두 개의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구슬’들만 굴러다닐 뿐 꿰어 보려는 시도가 없다. 과연 ‘가깝고도 먼 나라’다.

구슬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우경화, 아베노믹스, 공산당 선전... 우경화는 평화헌법 및 개헌논의와 엮이고, 아베노믹스는 엔화 절하와 연관되어 증시예측으로 나아가며, 공산당 선전은 민주당의 몰락 및 반아베 정서와 연결되기도 한다. 조선일보에서 난데없이 지난 대선 진보지식인들의 주문과 비슷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투표해서 개헌 막읍시다’란 메시지를 담은 기사가 등장하고, 경향신문 등에선 공산당이 지역구 당선자를 낸 것에서 희망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은 분석이라고 평하기엔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가령 아베 신조의 자민당과 공명회가 선전하는 것을 일본 우경화의 증거라고 본다면 ‘위안부 망언’을 일삼았던 하시모토 도오루의 유신회는 어째서 참패했는지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자민당과 유신회의 교차를 본다면 일본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일본의 보통국가화나 미국에 대한 당당함에는 호감이 있는 반면 전쟁범죄를 부인하여 아시아와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것에는 별로 선호가 없는 듯하다.

▲ 금일(22일)자 한겨레 5면 기사

그럼에도 한국 진보언론이 지난 대선 ‘박근혜 집권하면 유신 온다!’고 소리쳤듯 보수언론들조차 ‘아베가 이기면 개헌 온다’!는 식의 제목 편집을 하며 조회수나 올리고 있는 것이 한국 언론의 실상이다. 물론 그런 부류의 기사들 옆에는 아베 총리가 실질적으로 개헌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 정도가 배치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오버’를 희석하는 ‘물타기’도 감행된다.

결국 자민당의 압승의 이유는 선거 전인 19일자 세계일보 19면에 실린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정치학 교수의 지적처럼 “중국이나 한국의 상승세로 일본 국민들이 자신감을 잃어버린 시기에 아베 내각이 아베노믹스를 통해 일본을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공언하니 일단 믿어볼까 하는 국민들이 많아진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간 자민당의 텃밭이었던 농민들은 TPP(아시아ㆍ태평양 지역 관세철폐와 경제통합을 목표로 하는 자유무역협정) 문제로 자민당을 이탈한 반면 오히려 2~30대 청년층에서 자민당 지지가 대세인 정황도 그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몰락한 자리에서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도 정치적 좌우대결이라는 이념의 좌표가 상실되고 악화되는 삶의 문제를 기탁할 정치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아베노믹스를 택하고 어떤 이들은 아베노믹스에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공산당을 택했던 것 뿐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지점에서 공산당의 선전을 고무적으로 바라본다거나 한국 사회 진보정당의 ‘벤처 마킹’ 사례로 생각하는 시선이 사안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식인지도 의문이다. 이는 불과 4년 전인 2009년에 일본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때 한국 사회의 꽤 많은 진보지식인들이 일본 사회의 정치적 변혁을 부러워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정권교체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한국 사회가 일본 사회보다 먼저 그것을 겪었고 그 후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확했음에도 그랬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민주당은 한국 민주당보다 더 참혹한 실패의 사례가 되어 있다.

▲ 금일(22일)자 경향신문 6면 기사

한국 신문들의 일본 선거 결과에 대한 비평이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실용주의적 이유로, 우리 사회의 정치담론이 일본 사회를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해당 현상의 한국 사회에 대한 유불리의 측면만을 따지기 때문이다. 둘은 그러한 실용주의가 가능한 이유로, 우리 사회의 정치담론이 일본 사회 역시 한국 사회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을 거라는 인지를 하지 못하기에 그 사회를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한국어판 출판을 계기로 방한한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소비의 방식에서도 비슷한 사정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지식인들만이 야스다 고이치가 묘사한 일본 사회에서 한국 사회 문제와의 유사성을 보고 그것에서 비평적 가치를 느꼈다. 그러나 언론보도에선 야스다 고이치가 ‘일베’에 대해 평한 것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둔갑하였으며 언론노출도에 비해 책의 판매도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일본인이 한국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 정도 있지만 ‘일본의 사회 문제와 그것이 한국 사회 문제의 해결에 시사하는 바에 대한 호기심’은 거의 없다 시피한 상황이라 평할 수 있다.

씁쓸한 일이지만 일본 참의원 선거 결과에 대한 한국 신문의 비평이 ‘수박 겉핥기’에 머무르는 상황을 만들어낸 토양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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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xct 2013-07-23 06:16:19
좋은 기사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