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정상회담 대화록 실종사건 '진실게임' < 비평 < 뉴스 < 큐레이션기사 - 미디어스

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주요메뉴

본문영역

비평

[비평]'원본'없이 '복제물'이 지배하는 ‘진상’의정국

정상회담 대화록 실종사건 '진실게임'

2013. 07. 18 by 김민하 기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2007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철학자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인기 스타 중 한 명이었는데 <사물의 체계>, <사라짐에 대하여>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 중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된 책의 제목은 <시뮬라시옹>이다. 이 책은 복제물인 ‘시뮬라크르’가 실재보다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가 되어 원본을 대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이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 관련 긴급회의에 출석해 굳은표정으로 앉아 있다. (뉴스1)
국가기록원이 18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소식을 들으며 <시뮬라시옹>을 떠올렸다.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면서 벌어진 ‘참여정부 NLL 포기 논란’의 진실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됐던 ‘원본’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철학적 허무감을 안겨준다. 거듭된 탐구로 진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소박한 믿음은 그러한 환상 너머에 있는 것은 오로지 텅 빈 공간뿐이라는 통찰을 얻게 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진정한 무엇’은 없고 오로지 정쟁만이 남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해프닝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 사태의 첫 번째 가능성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증발 사건이 단순한 해프닝에 그치게 되는 경우이다. 즉, 민주당의 주장대로 그냥 아직 못 찾은 것이지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거라는 얘기다.

18일 참여정부의 마지막 기록물 담당 비서관으로 알려진 김정호 전 비서관은 CBS라디오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가기록원 측이 기술적 어려움으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찾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지적을 내놓았다. 김정호 전 비서관은 “이건 누가 찾아줘야 하는데 검색 기능만 가지고서는 그게 변환이 안 된다”라며 “업무관리 시스템에 들어 있는 기록물들은 다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한 건 한 건으로 분리가 안 된 채라 그걸 현재 대통령기록관의 문서검색 기능으로는 못 찾을 수도 있다고 본다”고 발언한 바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참여정부가 사용한 ‘이지원’이라는 업무 시스템과 국가기록원이 사용하는 PAMS(대통령 기록물 관리 시스템)의 차이가 자료 검색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이번 사태가 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점이라는 것도 기술적 어려움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시각 또한 있다. 대통령 지정 기록물은 15년간 보호 받도록 되어 있는데, 이러한 경우 PAMS에서 제대로 검색이 되는지 여부 또한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의 주장대로 참여정부 시기 백업된 ‘이지원’ 업무 시스템을 다시 구축하는 방식을 이용하면 기록을 되살릴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시일이 걸리는 일이며 또 다른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는 한계는 있다. 김정호 전 비서관은 백업되어 있는 이지원 시스템을 다시 구축해 프로그램을 수정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도 한 바 있다. 즉, 중립성을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재구축된다는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지웠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좀 더 그럴듯한 음모론이 제기된다. 그것은 참여정부에서 이관된 기록물을 이명박 정부가 손을 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SNS등을 통해 2010년 당시 행정안전부가 대통령기록관장에 김선진 당시 청와대 메시지기획관리관실 행정관을 임명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이 시기 삭제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이다.

▲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가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전 원내대표는 이날 회의에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찾지 못했다는 보도와 관련, "참여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이 기록물 삭제했을 가능성 전무하다"고 밝혔다. (뉴스1)

이는 새누리당 유력 인사들이 대선기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발췌본을 활용해 유리하게 써먹으려고 했었던 정황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즉, 이명박 정부가 2010년부터 2012년 대선에서 야권에 NLL포기 의혹을 뒤집어씌울 ‘컨틴전시 플랜’을 기획해왔으며, 이를 위한 치밀한 준비를 해왔고, 이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경우 야당이 국가기록원이 보관 중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의 열람을 공개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상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음모론이 사실이라고 해도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의 음모론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제기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삭제를 지시했다?

<문화일보>는 18일자 1면 기사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 대한 삭제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는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해당 관계자는 “당시 회담록은 청와대 보관본과 국가정보원 보관본으로 나뉘어 보관되다 노 전 대통령이 임기 말인 2007년 말과 2008년 초 사이에 폐기를 지시했다”고 증언하였다는데, <문화일보>는 이 발언을 들어 해당 기록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봉하마을로 옮겨졌을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나섰다.

▲ 사실상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를 지시했다는 주장을 보도한 문화일보 18일자 기사.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지들도 18일 관련 보도에서 일제히 <문화일보>의 과거 기사와 동일한 논리를 차용해 노무현 정권에서 기록이 삭제됐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당시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식의 서술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불리하게 작용될 가능성이 있는 기록을 스스로 삭제했다는 음모론이 구성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8년 대통령기록물 유출 논란에 휩싸인 것 역시 이러한 이유일 것이라는 식의 추측이 가능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러한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을 열람하면 참여정부가 NLL을 실제로 포기하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날 것임을 걱정했다는 식의 주장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 관계자들은 모든 대통령기록물을 국가기록원에 넘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인용된 김정호 전 비서관은 기록물을 이관하는 과정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만 빠졌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빠질 가능성은 없다”며 “대통령이 서명을 한 이상 그건 그대로 보존되게 돼 있다”는 대답을 내놓은 바 있다.

결국 진실게임 국면으로

어쨌든 국정원 관련 국정조사 재개로 ‘진도’를 뺄 수 있을 것 같았던 국회 상황은 다시 남북정상회담 기록물 관리의 책임을 둘러싼 진실게임 국면으로 진입하게 됐다. 위에서 언급한 두 판본의 음모론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광범위하게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고 논란이 해프닝으로 귀결되지 않는 이상 전선의 교착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 측은 기록물 논란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이 우선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으나 국정조사에 대해서는 비공개 진행 여부, 기관의 보고 형식과 일정에 대한 이견 등을 주장해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마저 받고 있다. 결국 강 대 강 정국에 정치적 힘이 쏠리는 국면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여야 원내대표와 열람위원 간사들이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 관련 긴급회의에 앞서 비공개 회동을 갖고 있다. (뉴스1)

양측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안철수 무소속 의원은 진실게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애초 제기된 국정원 개혁 문제를 논하자는 입장을 계속 밀고 가겠지만 사안의 폭발력이 워낙 커 당분간은 이러한 목소리가 정국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수 있게 됐다. 정치적 스포트라이트가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힘 겨루기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민주당 내 강경파들의 장외투쟁론도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과 관련한 논란이 장기화 될수록 힘을 얻게 될 공산이 커졌다. 국회 내에서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현실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온갖 ‘복제물’들이 정국을 지배하며 각자가 ‘진상’을 대체하는 철학적 순간이 이렇게 눈 앞에 펼쳐지고 마는 것이다. 국회의 정치와 거리의 정치가 모두 안갯속에 빠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