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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의 ‘언론을 묻는다’] 다큐 <나를 찾아줘> 연출한 우종훈 광주 MBC 기자

42년 만에 제자리로…양창근, 김광복이 보내는 오월의 청원

2022. 05. 26 by 이영광 객원기자

[미디어스=이영광 객원기자] 광주MBC가 5.18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아 지난 12일 다큐멘터리 <나를 찾아줘>(☞바로가기)를 방송했다. 다큐 <나를 찾아줘>는 42년 만에 유해가 뒤바뀌어 매장된 것으로 밝혀진 당시 고등학생 양창근의 죽음을 추적하며 5·18 행방불명자와 무명 열사 문제를 조명했다.

KBS 드라마 <오월의 청춘> 주연 배우 고민시 씨가 내레이션 맡아 화제가 된 <나를 찾아줘>는 PD가 아닌 기자가 연출했단 점도 색다르다. <나를 찾아줘> 연출, 제작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9일 광주MBC 사옥에서 우종훈 기자를 만났다. 다음은 우 기자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광주MBC 5.18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를 찾아줘>

기자라 다큐 연출은 처음 하셨을 것 같은데, 5·18 특집 다큐 <나를 찾아줘> 방송 끝낸 소회가 궁금합니다

“방송본은 수십 차례 확인했던 영상이에요.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기자이고 처음 장편물을 제작하다 보니 이야기 흐름 같은 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2분짜리 리포트만 만들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스토리라인에 대한 고민, 또 보도할 때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면 되지만 다큐는 시청자가 어떻게 쉽게 이해하고 재밌게 볼 수 있을까라는 부분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돼서 스스로 발전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목이 <나를 찾아줘>인데,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요?

“제목이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무명 열사와 행불자의 이야기 다루는 다큐라, 이분들이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실까 생각했어요. 사라진 그분들이라면 ‘찾아달라’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행불자 가족회 등에서 다른 느낌의 제목이라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5.18 무명 열사와 행불자 다큐를 제작하신 계기는?

“작년 12월에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조사 결과를 발표했어요. 민주 묘지에 양창근이란 사람의 묘가 있는데, 매장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실제 양창근은 무명 열사 묘에 묻혀 있더라는 거예요. 일단 그 스토리가 궁금했고, 취재하면서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문재학 열사와 친구라는 점도 알게 돼서 시작했어요. 또 자연스럽게 그러면 양창근의 묘라는 곳에 묻혀 있는 분은 누구인지 같이 추적하다가 다행히 저희 다큐 말미쯤에 그 결과가 나와서 제작하게 됐습니다.”

우종훈 광주 MBC 기자 (사진=이영광 기자)

사전에 취재와 공부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일단은 자료를 많이 봤어요. 5·18민주화운동 기본서라고 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책을 봤어요. 그런데 행불자 관련 서적은 거의 없어요. 유일하게 있는 자료가 5.18 기념재단과 유족회가 엮어낸 책 중에 행불자 70여 명의 가족들을 다 만나서 구술 기록을 받아 놓은 게 있거든요. 그것도 봤죠,”

서기원 당시 청와대 대변인의 최규하 전 대통령 특별성명 낭독으로 다큐를 시작했잖아요.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있을까요?

“양창근이라는 인물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싶었어요. 묘지가 바뀐 문제는 나중에 배치하고, 양창근이 누구이며 누구의 친구고 이런 이야기부터 접근하고자 그 장면을 먼저 구성했어요. 서기원 대변인의 최규하 대통령 성명 낭독은 전국으로 계엄령이 확대되는 발표였는데, 양창근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게 이 발표 후 휴교령이 내려지고 나서였거든요.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접근할 때 그 장면이 시작으로서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양창근 학생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형님을 통해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5.18 당시 부모님이 나가지 말라고 여러 번 잡으셨대요. 근데 옆에 있는 형, 친구 등이 맞으니까 그걸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특별히 정의로웠다기보다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사망 시각 등이 맞지 않잖아요. 검시조서에 나오는 사망 시각과 사인은 누구의 것인가요?

“양창근의 묘에 묻힌, 양창근이 아닌 그 유해는 유진관이라는 이름으로 검시를 받았었거든요. 진짜 창근이는 문민규란 새로운 이름으로 검시를 받았는데 그런 과정들이 그만큼 혼란스러웠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희가 적십자 병원 간호사 분을 만나 취재해보니, 당시 그런 병원 진료기록을 제대로 적을 시간이 없었대요. 환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때문에 처치부터 빨리하고 뭔가를 적을 수 있었고, 그마저도 기록이 안 된 사람들은 관에 누워 도청과 상무관 갔다가 묘지 가고 이랬던 거거든요.”

광주MBC 5.18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를 찾아줘>

친구 문재학이 양창근을 봤다고 나와요, 그렇다면 양창근 가족에게 소재를 알려줬을 것 같거든요?

“혼란스러운 그때 상황을 알 수가 있는 부분인데, 양창근의 실제 유해는 도청에 계속 안치가 돼 있었어요. 당시 도청에 안치된 시신들은 가족이 거기 와서 찾으면 상무관으로 보냈거든요. 근데 재학이가 창근이를 봤을 때는 아직 가족을 못 찾았기 때문에 도청에 있었던 상황이에요. 재학이 어머님 말씀으론,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오기 이틀 전인 25일 어머님이 재학이에게 집에 가자고 하니까 ‘창근이 장례 치러줘야 돼서 못 간다.’고 했대요. 그래서 어머니는 ‘창근이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아냐?’라고 물으니 ‘엄마 내 친구인데 그걸 모르겠냐, 얼굴을 봤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결국 재학이가 살아있었으면 창근이는 다른 이름으로 묻힐 일이 없었겠죠.”

그런데 어떻게 김광복이 양창근으로 됐을까요?

“그 부분 때문에 저희도 최대한 찾아볼 만한 곳은 다 갔지만 몰라요. 왜냐하면 다 고인이시기 때문에요. 이분들이 왜 본인의 아들이라고 판단했는지까지 직접 확인하지 못했죠. 생존자이신 양창근의 형님도 당시 군인이었어요. 근데 저희가 찾은 자료 중, 1980년 6월 13일에 광주직할시청에서 이름 없는 유해가 누구로 됐다는 기록에 ‘양창근 당시 광주 숭의실고 1학년 학생’란 기록이 있거든요. 병원 기록 같은 걸 찾아보니 당시 신분증도 없고 머리에 총을 맞아 얼굴도 알아볼 수도 없고, 땅에 이미 묻혀 있었죠. 근데 어떻게 아들인지 알았냐라고 했을 때 광주직할시청에서 ‘당신의 아들 양창근이 묻혔다’라고 했어요. 인상착의 혹은 복장을 토대로 연락받고 묘지로 가셨던 거예요.”

김광복과 양창근이 같은 학교였나요?

“아니에요. 두 분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요. 김광복이라는 분은 당시 14살이었고, 그때 학교 안 다니고 가구공장에서 일하고 계셨어요. 이분이 사라진 경위와 양창근이 사라진 경위도 완전히 달라요. 김광복은 21일 도청 발포가 있었을 때 전남대 앞에서 시위대 차량에 탑승한 뒤에 사라졌고, 양창근은 휴교령 내려지고 시위에 합류한 뒤에 집으로 못 돌아온 거기 때문에 둘의 접점은 없죠.”

광주MBC 5.18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를 찾아줘>

양창근이 문민규로 바뀌잖아요. 문민규는 가공인물인가요?

“문민규도 실재하는 인물이에요. 양창근의 유해가 적십자병원에 있다가 도청으로 왔고, 그러고 나서 도청 진압 작전이 끝난 이후 상무관으로 시신들이 옮겨지거든요. 그 상황에 문민규라는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와서 자기 아들이 맞다고 확인해준 거예요. 근데 진압 작전 끝나고 문민규라는 아들이 돌아왔으니, 이 시신은 문민규가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관에 붙은 문민규라는 이름은 떼고 무명이 붙은 거거든요. 무명인 그 상태로 묘지에 묻혀요. 그리고 나서 42년 동안 무명 열사로 남은 거예요.”

5‧18 진상규명위가 김광복 님 가족에게 소식 전할 때 분위기가 어땠나요?

“진상조사위원회가 김광복의 형님에게 자료를 전달해 드리는 상황에 저희도 갔었거든요. 근데 김광복의 형님은 이미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동생 찾았다는 전화를 받았나 봐요. 그래서 그 조서를 전달해주는 때는 감정적인 부분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끝나자마자 저희가 묘지로 바로 모시고 갔는데, 그때 질문을 드렸던 게 ‘오늘은 형님한테는 기쁜 날입니까, 슬픈 날입니까’예요. 한참 고민하시더니 슬픈 날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이제라도 동생을 찾았으니 기쁘셨을 것 같은데

“물론 다행스럽고 기쁘긴 하셨겠죠. 그런데 김광복의 어머니께서 행불자회 활동을 열심히 하셨던 분이시더라고요. 그런 어머니의 평생 고충도 생각나고, 40년 동안 그렇게 찾았는데 여기에 실제 묻혀 있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허탈함, 슬픔 이런 것들이 더 커 보였어요. 이번 일 자체가 슬프다기보다 그런 지난 세월이 허탈하고 슬픈 거죠.”

광주MBC 5.18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를 찾아줘>

당시 박영진 교수는 상무관 간 적 없다고 나오던데, 그럼 검안 조서는 조작된 것인가요?

“박영진 교수는 도용이고 조작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저희가 박영진 교수 만나러 갈 때 그런 대답 바란 건 아니었거든요. 양창근의 시신이 있는 검안서에 28일 상무관에서 검시가 됐다고 돼 있거든요. 근데 박영진 교수는 상무관에 간 적이 없다고 얘기를 해요. 이분은 당시 조선대 레지던트였는데, 27일 진압 작전이 끝나고 계엄군이 의사들한테 검시하라고 해서 갔을 때 전남대 의대가 상무관으로 갔고 조선대학교는 도청에만 있었대요. 당시 박영진 교수가 본 시신들은 부패한 시신들이 아니라, 도청 진압 작전이 막 끝났기 때문에 부패 안 된 시신이라고 말하거든요. 본인은 그 외에는 본 적이 없고 상무관 가서 검시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예 안 간 건가요, 아니면 28일에 안 간 건가요?

“검시를 27일과 28일 이틀밖에 안 했어요. 당시 계엄군이 모두 다 장악한 상황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시신을 관리하던 시기였잖아요. 그 상황에 의사들이 나가서 검시할 수는 없는 거고, 다 끝나고 가서 했다면 그때밖에 없었죠. 그래서 ‘상무관에 간 적 없으시냐? 왜 여기 이름이 적혀 있냐?’라고 물으니, 본인이 상무관에 갔던 건 의사로서 간 게 아니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 거라고 했어요. 그때 상무관에 시신들이 안치돼 있었으니까 관중석 쪽에서 한번 내려다본 적은 있지만, 5‧18 기간 동안 검시하러 상무관에 간 적이 없다는 거죠.

다큐멘터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건 도용입니다.’라고 하는 부분에서 끝나거든요. 제작진이 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확인할 수 있는 게 없었죠. 이런 검시 같은 것도 그분은 조작이라고 표현하시지만 당사자의 증언만으로 저희가 조작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고, 매우 허술하고 공백이 많았단 정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거죠.”

이 문제도 진실규명이 필요하겠네요?

“이 부분은 조금 더 취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쭉 창근이와 광복이 얘기를 하다가 전혀 다른 의혹이 나온 거잖아요. 저도 계속 취재하다가 오히려 지금까지 진행해 온 이야기들을 진전시키지 못하겠단 생각에 그 정도의 의혹 제기만 해 놓고 정리했죠. 다큐에는 담지 못했지만, 여기에 검찰들 이름도 있거든요. 그 검찰들을 수소문해서 전화도 해봤지만 다들 인터뷰는 거절했어요.”

지금 행불자는 몇 명인가요?

“보상법 신청이 7차까지 이어졌거든요. 광주시에 242명이 5‧18 행불자 접수를 했는데, 이 중 84명만 인정이 됐어요. 왜냐면 행불된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데,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거죠. 84명 중에 DNA 대조 작업해서 2002년에 또 밝혀진 사람들이 6명인가 있거든요. 그리고 김광복과 또 한 명 제외하고 76명이 아직 못 돌아오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행불자 가운데 아직 행방불명된 사람은 76명입니다.”

광주MBC 5.18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를 찾아줘>

40여 년이 지났지만 행불자 가족은 여전히 80년 5월에 시간이 멈춰있나 봐요

“맞아요. 가족들은 계속해서 80년 5월에 살고 계신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저희도 가족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 뵙고 싶었는데, 어렵게 수소문해서 연락드리면 ‘매년 5월이면 똑같은 얘기를 해도 어차피 우리 아들은 안 돌아오는데, 이젠 지치고 인터뷰할 때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생긴다’라고 많이들 거부하시더라고요.”

엔딩에 행불자 명단이 나오던데,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요?

“한 컷당 10명씩 이름을 넣었는데도 영상은 1분이 넘거든요. 행불자가 이렇게 많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양창근과 김광복 얘기만 했지만, 궁극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배치했습니다.”

취재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가족분들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느꼈던 부분인데, 이제 정말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죠. 예를 들어 아들 유해조차 확인 못하고 세상을 떠난 양창근의 어머니 아버지는 결국 창근이가 어디에 묻혔는지 평생 알지 못하셨어요. 김광복의 어머니도 평생 아들을 그렇게 찾았는데 구순이 넘으시니 건강 상태가 안 좋으셔서 아직 모르세요. 시간이 정말 얼마 없으니 진실 규명이 어디까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삐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40년이 훌쩍 지났고, 이제 고령의 가족들은 기다려주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취재하며 어려웠던 점은?

“기술적인 문제로만 보자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료를 찾는 게 제일 힘들었고요. 그리고 대부분 가족들이 어디 계시는 줄도 모르고, 찾아 연락드린다고 한들 인터뷰에 응해 주시지 않는 그 상황에 송구스러움도 있었죠. 그런 게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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