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대물>의 정치가 '초딩'들의 방과 후 잡담수준이었다면, KBS <프레지던트>가 묘사하는 정치는 최소한 전공 학부생들의 논쟁 수준은 된다. 두 드라마의 짜임새 차이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드로메다와 지구의 거리만큼이나 어마어마하다.
얼마 전 종영 된 <대물>이 진부한 멜로드라마의 틀에 도덕 교과서를 그대로 베낀 듯한 비현실적 정치적 대사로 점철됐다면, <프레지던트>는 권력에 관한 의지를 미스터리 장르의 시선에서 현실적으로 치밀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프레지던트>는 간만에 TV에 등장한 '웰메이드' 정치 드라마이지만, <대물>과 달리 시청률 면에선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개헌'으로 압축되는 권력 구조 개편의 바람몰이가 어떻게 기획되고 또 추동되는가를 섬세하게 통찰한 장면이었다. '미디어 정치'라고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필연적 무대가 어떻게 정치인을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하는지도 적절하게 묘사해낸 장면이기도 했다.
우연찮게도 현재, 여의도 정가에서 '개헌'의 바람몰이가 시작되고 있다. 지난 3일,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와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가 회동을 갖고 개헌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양당 대표는 개헌 합의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정확히 <대물>만큼 진부한 정치적 대사를 읊었다.
이회창 대표 역시 개헌이 "21세기형 국가구조를 담는 방향이 모색돼야 할 것"이라며 개헌 합의의 변을 밝혔다. 이 대표가 시계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모르겠지만, 21세기를 맞이 한지도 이제 10년도 넘었다. 불과, 몇 년 전 등장했던 '참여민주주의'와 같은 국가구조의 새로운 모형은 언제 있었기나 했냐는 듯 정치의 수준이 20세기로 퇴행했다. 무엇보다 '차떼기'로 정치를 했던 이 대표가 아직도 정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개헌에 한 마디를 보탰고, 이재오 특임장관은 진즉부터 '개헌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이 모두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개헌을 통해 당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냐”고.
<프레지던트>의 고상렬은 스캔들이 터져 경선에서 중도 사퇴한 박을섭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우님, 개헌이 되면 나나 자네한테 해가 될 건 없을 것 같은데."
절묘하다. 고상렬과 박을섭은 당 조직을 장악하고, 당내 정치에 능하지만 직선제 하에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전무 한 인물들이다. 고상렬은 외모가 안 되고, 박을섭은 언변이 딸린다. 전반적으로 이걸 여의도에선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한다. '미디어 정치'에서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은 너무나 결정적인 것으로 절대 '용꿈'을 꿀 수 없게 하는 핸디캡이다.
그런 이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각제가 됐건 아니면 다른 방식의 권력 분산형 개헌이 됐건 직선제를 하지 않는 것뿐이다. 집권당 내부 정치로 간판이 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잡는 것 외엔 집권의 방법이 없다.
현재로서 개헌이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단, 개헌에 대한 여론의 동요가 전혀 없다. 실제 왜 개헌이 되어야 하는가보단, 지금 같은 대통령은 안 되겠다는 것이 오히려 민심의 주류가 아닐까 싶다. 개헌을 띄우는 이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이들의 심정은 '개헌이 되면 해가 될 건 없다'는 고상렬 대표의 그것과 같을 뿐이다.
친이계엔 후보가 없다. 그나마 오세훈 서울시장 정도가 대중성을 갖춘 이인데, 무상급식 논란에서 보듯 준비도 안 된 채 이미지만 팔자고 덤비는 모양새다.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니 차라리 다수당이 집권하는 형태로 권력 구조를 개편해 '내가 왕이 되자'는 생각을 한 이가 없었을까? 고상렬 대표의 발언은 허구인가, 드라마의 상상력이 현실과 견줘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