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국민들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보수정치의 부활’은 여의도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대화의 주요 주제다. 여의도 호사가들은 문재인 정권을 ‘진보정권’으로 부르면서 국민의당과 정의당까지 한묶음으로 사고하는 것에 익숙하다. ‘보수정치’는 ‘진보정권’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주요 플레이어다. 그러므로 보수정치의 부활을 논한다는 것은 앞으로 이들 정당의 진로를 예상해본다는 말과 같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회고록을 낸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회창 전 총재가 회고록에서 밝힌 나름의 소회는 현역 시절 밝혀온 입장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에 무엇을 썼느냐보다는 이회창 전 총재가 회고록을 냈다는 사건 자체가 더 중요하다. 현재 보수정치의 처지를 조망해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이회창 회고록' 출간기념회에서 회고록에 담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 보수정치에는 구심점이 없다. 지난 대선에서의 성과를 자랑스러워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현재 보수정치의 앞날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구심점’이란 평가를 받기엔 한참 부족하다. 오히려 분란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다. 바른정당은 대선 당시부터 홍준표 대표의 몰상식을 비판해왔다는 점을 보면 홍준표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정치의 어떤 정돈(?)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홍준표 대표가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 논의에 불을 붙이는 것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홍준표 대표는 22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 문제를 언급하며 “유무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책임의 문제”라고 했다. 당 내외에 걸쳐있는 소수 친박 성향 인사들은 이런 발언에 불쾌감을 내비치고 있으나 결론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출당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여론이 당 내에서도 힘을 얻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이유는 내년 지방선거 때문이다. 이대로 지방선거를 치를 수는 없다는 인식이 야권 전체에 팽배하다. ‘실패한 정권’과 ‘보수정치 분열’이란 굴레를 안고 지방선거를 돌파하기엔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선거 국면에서 조직적 기반이 허물어지는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현역 국회의원들 입장에서 지방선거 이후 지역조직이 유실된다는 것은 2020년 총선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보수정치의 입장에선 지난해 분당 국면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다. 당시 당을 떠나는 것에 미온적이었던 인사들이 마지막까지 요구한 것은 친박계 주요 인사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었다. 지금의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분리 체제는 당시 지도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자유한국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인적청산을 감행한다면 ‘보수 통합’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추기 위한 일종의 ‘산수’다.

그나마 원로 중에서 보수정치의 ‘구심점’이 될 자격을 갖췄다고 볼 만한 이회창 전 총재의 회고록 발간은 이 계산에 힘을 싣는 것이다. 이회창 전 총재는 22일 회고록 발간에 관한 기자간담회에서 “큰 선거가 다가오면 보수는 보수대로 합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올 것”이라면서 과거 DJP연합을 보며 느낀 문제를 언급했다. 합종연횡이 선거에서는 위력을 발휘할지 몰라도 이후에는 오히려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1997년 대선에서 이뤄진 DJP연합은 서로 정치노선을 달리하는 세력이 선거 승리를 위해 손을 잡은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이 점을 놓고 보면 이회창 전 총재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하다. 현재 여의도 정치에서 DJP연합에 비견할만한 정계개편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어떤 형태로든 손을 잡는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통합은 더욱 먼 일이 될 것이다.

국민의당 전당대회에 출마한 안철수 전 대표로서는 다소 당혹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간 언론은 안철수 전 대표 측과 바른정당 일부 인사들이 내년 지방선거를 고리로 손을 잡는 방안에 대해 교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안철수 전 대표는 문준용 씨 취업 특혜 증거 조작 사건에도 출마를 강행한 이유를 당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당이 해체될 수 있다는 주장은 더불어민주당에 흡수통합 되거나 일부 의원들이 당적을 옮겨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막겠다는 것은 현 정권을 멀리하면서도 살아남는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다. 즉, 안철수 전 대표의 ‘우려’는 서두에 언급한 보수정치 부활의 조건을 논하는 여의도 호사가들과 현실인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수정치’란 주제에 안철수 전 대표라는 변수까지 넣어 수많은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여러 내용의 ‘산수’로 과연 보수정치가 부활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회창 전 총재 등이 사고하는 것과 달리 DJP연합과 자유한국당-바른정당 재통합, 또는 안철수 전 대표 등을 변수로 포함한 보수정치 부활 시나리오 등은 오로지 권력 쟁취를 향한 기성 정치의 결단에 따른 해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2017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수정치가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히려 ‘신실성’의 회복이다. 예를 들면 공영방송 문제다. 이명박 정권이 내려 보낸 낙하산 사장에 저항하기 위해 2012년 파업에 참가했다가 경이적 수준의 노동탄압에 시달린 MBC 언론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향한 걸음을 한 발자국씩 내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몇 차례나 공영방송의 문제를 언급했고 정부도 방송통신위원회와 고용노동부를 통해 일정한 압박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정부의 이런 행보는 방송의 독립성을 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상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을 필두로 한 보수정치 일반은 이를 ‘방송장악’으로 규정하고 가만있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심지어 언론인 출신의 국회의원까지 ‘방송장악저지투쟁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가세한 상태이다.

이들의 속내는 “MBC 밖에 안 남았다”라는 홍준표 대표의 한 마디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방송이 망가지든 말든 ‘보수세력에 정치적 이득인가 손해인가’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란 것이다. 실제 박근혜 정권 말기 자유한국당은 국회가 MBC의 노동탄압을 주도한 주요 책임자들에 대해 청문회를 실시하는 걸 막기 위해 의사일정을 전면 보이콧한 바 있다. MBC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충실히 반영한 보도를 선보이며 ‘애국방송’이 되는 것으로 이에 보답했다. 사회적으로 통제되는 공영방송이 아니라 권력의 기관지를 자처한 것이다. 이런 상식을 벗어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 이들이 정권의 방송장악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게 보수정치의 오늘이다.

보수정치 부활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정치 산수에 기초한 이런 저런 손익계산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 자체로서 다루는 성의를 보여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방송장악 문제로 국한해서 말하자면 적어도 지난 정권이 망가뜨린 공영방송을 정상으로 만든 다음에 방송의 독립성을 논하든지 말든지 하자는 것이다. 보수정부가 하는 것은 ‘나쁜 방송장악’이고 민주정부가 하는 건 ‘착한 방송장악’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상을 도착적으로 논하며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게 만드는 냉소적 기도를 그만 두어야 보수정치도 부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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