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주인공은 맥베스지만, 막상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맥베스는 그냥 귀가 얇은 조절장애를 가진 남자처럼 여겨진다. 세 명의 마녀와 아내, 예언을 빌어 그를 충동하는 마녀도 마녀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 맥베스의 욕망에 엔진을 달고 연료를 들이 붓는 역할의 아내를 빼놓고선 이 작품의 악행이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운명에 휘말린 맥베스를 인간적으로 나약한 인간으로 여기는 반면, 그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를 최종 보스마냥 악행의 주체 세력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원작의 ‘레이디 맥베스’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남편의 왕좌를 지키려하더니 결국 죄책감에 미쳐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버리는 걸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런 결말과 상관없이 '레이디 맥베스'는 욕망의 화신, 그 대명사가 되었다. 그렇게 욕망에 주도적으로 자신을 내맡긴 여성의 대명사가 된 그녀는 19세기라는 영국을 배경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등장한다.

아니, 영화 <레이디 맥베스> 이전에 역시나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언어적 시원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로부터 찾을 수 있지만, 영화적 설정은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러시아 전역을 유랑하다 만난 봉건적 러시아 사회 내 인간 군상의 실화로 비롯된다. 70살의 시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마을 광장에서 처형된 젊은 여성, 시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귀에 끓는 납을 부은 이 엽기적인 실화가 이 영화를 잉태했다.

젊은 며느리의 도발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 이미지

도대체 왜 젊은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죽여야 했을까? 거기엔 아직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를 인정받을 수 없는 전근대 사회 속의 여성의 존재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자신이 가진 권력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편을 왕으로 만들어야 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도 있고, 역사 속 다수의 여왕들이 있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의 존재에 의해 더 정확하게는 남편이 속한 사회적 계층의 이름표에 의해 여성 존재의 값이 매겨졌다는 것이 맞겠다.

그리하여 <레이디 맥베스>는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해 보이는 10대의, 소녀티가 벗어지지 않은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 그녀가 전에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는 전혀 설명치 않는다. 이 결혼으로 인해 그녀는 이제 지주 집안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당연히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바로 다음 장면이 보여주듯 거의 아버지뻘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남편과의 자식 생산. 하지만 영화는 결국 젊은 아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첫날밤 증명한다.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없는 며느리. 몸을 옥죄는 옷을 입고 앉아서 조는 거 말고는 할 일이라고는 없는 꽃다운 나이의 그녀. 집안 광산에 생긴 사고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주 집안 며느리로 하인들 단속에 나섰던 그녀의 눈에 자신을 거스른 한 사람에게 오히려 매료된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 이미지

그런데 씨받이로 들인 젊은 며느리가 불능인 남편 대신 젊은 하인과 바람나는 설정, 이는 '열녀문의 비밀' 식으로 <전설의 고향> 등을 비롯한 다수 전래 괴담의 단골 소재였다. 이들 역시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에 근거한 설화였다. 가문의 전통과 혈연적 승계를 위해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원작의 러시아, 영화의 배경인 영국 등 세계 그 어느 곳이든 아직 여성을 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어느 곳에서나 쉬이 만날 수 있는 '괴담'들이다.

영화 속 캐서린이 살았던 19세기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시민혁명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가 갖춰져 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과 별개로 시골 마을 지주의 아내이자 딸인 캐서린에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작황도 좋지 않은 밭과 돈 몇 푼에 그녀를 사온 시아버지는 그녀에게 지주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요한다.

열녀문의 희생 대신, 권력의 화신이 된

그 '괴담'의 주인공들은 끓는 납을 시아버지 귀에 부어 살인을 저질렀지만, 결국 광장에서 처형되거나 열녀문의 희생자로 전해진다. 그런데 21세기에 재연된 <레이디 맥베스>의 여주인공 캐서린은 괴담의 주인공이 된 그녀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물론 시작은 욕망이다. 불구인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을 요구하고 절도 있는 예절을 요구하는 시아버지, 그런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의 틈에서 그녀는 거침없이 욕망의 일탈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에스컬레이션을 타고 연인과의 밀애를 위해 방해물을 하나둘씩 제거해 나가는 것으로 나아간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 이미지

전근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일탈은 곧 부도덕이란 낙인과 함께 가장 엄격한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남성의 혈연에 의해 계승되는 사회에서, 그 혈연의 승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여성의 순결성이야말로 그 제도를 가능케 해주는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남성과 여성의 성적 욕망은 중요치 않다. 영화는 바로 그런 배제된 여성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운다. 19세기의 <마담 보바리>의 성적인 일탈이 곧 사회적으로 억눌린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듯, <레이디 맥베스> 역시 캐서린의 욕망을 직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마담 보바리>를 비롯하여 원작 <레이디 맥베스>, 그리고 숱한 우리네의 열녀문이란 허상 속에 스러져간 여성 잔혹사 속 주인공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채 사랑이란 멍에를 짊어지고 스러져 간 것과 달리, 캐서린은 자신의 욕망을 지켜내기 위해 '남성'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쟁탈한다.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대신, 그 욕망의 대상조차 자신이 쟁탈한 권력을 위해 거침없이 제물로 삼는 과정은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뜻한다. 비록 그 권력이 그 커다란 집안에 그녀 혼자 오도카니 남겨진 것이라 해도.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만나는 가장 본능적인 과정은 역사를 통해 제도화된다. 하지만 그 제도는 사회의 주도권이 남성에 의해 편제되는 과정에서 여성 존재 자체는 물론, 여성의 성도 소외되고 만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그 소외된 여성의 성과 욕망에 대한 직시에서부터 문제를 바라본다. 삿된 욕망이 아니라, 팔려온 소녀의 정당한 자기 욕망이 왜곡되어졌을 때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정당한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의 표현 과정에서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그녀의 부당한 대우는 '권력'을 가진 남성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반작용으로 캐서린은 자신의 권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한다. 그 욕망의 끝에서 파멸하고야마는 여성들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사랑조차도 권력 앞에 희생하고마는 새로운 권력의 주체 캐서린의 존재는 낯설지만, 이제는 던져봐야 할 질문이 된다.

물론 영화는 쉽게 캐서린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돈에 팔려왔지만 남편과 시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거뜬히 채찍을 손에 들었던 백인 여성 지주가 된 캐서린. 비록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마을 공동체와의 관계에서는 '을'이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그들의 목숨이 마차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하녀와 하인의 존재에 이르면 인종과 계급의 모순 역시 놓치지 않는다. 아니 그러기에 어쩌면 <레이디 맥베스>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 그리고 사회라는 그 체계 자체에 대한 깊은 질문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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