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며칠 전만 해도 모든 언론들은 톱뉴스에 한반도 위기설을 올려놓았다. 자연 야당 일부는 공허한 ‘코리안패싱’ ‘안보운전석론’ 등을 외치며 정부를 공격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이러다가 전쟁이 날 것만 같았다. 이미 오랜 세월 보수정권들의 북풍 통치에 단련된 우리 국민들도 대부분 그럴 리 없다고 태연하면서도 은근히 걱정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언론의 힘이다.

그랬던 언론지상에 돌연 위기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한반도 위기설을 단숨에 날려버린 것은 물론 극단으로 치닫던 북한과 미국의 설전이 다소 이성을 되찾은 탓이 크지만, 그 여운마저 남기지 않게 된 동기는 계란파동의 영향이다.

이처럼 언론들이 안보에서 계란로 옮겨간 배경에는 정부 비판 본능에 있다. 온 힘을 다해 보도를 했지만 한반도 위기론에는 딱히 문재인 정부의 잘못을 추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계란, 그것도 친환경농장에서의 살충제가 든 계란이라면 정부는 어쨌든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어쩌면 처음 맞은 절호의 공격 기회에 그만 이성을 잃고 스스로 자살골을 넣는 경우도 발생했다.

국내 계란에서도 살충제 성분이 검출되며 시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16일 오후 농협하나로마트 서울 양재점에서 한 시민이 정부의 검사결과 적합판정을 받은 계란을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바른정당은 16일 살충제 계란과 관련해 논평을 내놓았다. 이종철 바른정당 대변인은 “분통이 터지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 4월 피프로닐 성분에 대한 소비자단체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 사실이다”면서 “정부는 사실관계를 밝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고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바른정당은 대단히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착각하고 있었다.

지난 4월은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정부를 끌어가던 때이다. 물론 정부의 연속성에 의해 그때의 잘못도 문재인 정부가 떠안아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바른정당이 노린 효과와는 전혀 다른 결과와 대면해야 했다. 바른정당을 향한 기사 댓글들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바른정당의 주장대로라면 이번 살충제 계란 파문이 문재인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만 부각시켜 준 셈이다.

어쨌든 모든 매체의 지면에서 전쟁위기설은 지워지고 그 자리는 계란으로 채워졌다. 물론 이는 매우 심각하게 다뤄야 할 사안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나 ‘안방의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파동을 겪은 우리들로서는 국민건강을 해칠 가능성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도 철저히 대처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이런 중대 이슈를 대하는 언론과 야당들의 태도가 너무 가볍다는 사실에 우려가 되는 것이다.

JTBC, 기자들이 뽑은 '영향력·신뢰도' 조사 모두 1위 (JTBC 뉴스룸 보도 영상 갈무리)

16일 JTBC <뉴스룸>은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자사가 신뢰도와 영향력에서 모두 1위를 한 사실을 뉴스 말미에 전했다. 대단히 자랑스러운 사실을 매우 겸손하게 짐짓 아무 일 아닌 듯 전한 태도는 오히려 멋졌지만 그래서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이 조사에서 기자들이 느끼는 언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74.8%나 될 정도로 높았다는 사실은 전하지 않았다. JTBC로서는 어쩌면 무관한 일일지도 모른다. 기자들이 느끼는 신뢰도는 시청자들은 더 높이 평가할 것이다. 60.4%가 기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과 다른 딜레마를 기자들 스스로 겪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수치의 사이의 아이러니를 감안한다면 기자들 스스로 판단하는 신뢰와 영향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시민들은 방송이나 포털의 뉴스보다 SNS를 통해 걸러진 뉴스를 더 선호하고 있다.

한편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말한 것처럼 8월 위기설은 “미국 군산복합체의 장삿속에 의한 가짜뉴스“라는 말이 발언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미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 언론은 또 왜 그랬냐는 말이다.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던 8월 위기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아마도 계란 파동이 잠잠해지면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 가능성도 매우 크다. 또한 살충제 계란이 덮어버린 것은 8월 위기설만은 아니다. 언론으로서는 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장충기 문자 게이트도 무사히 빠져나가고 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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