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한 정책 아젠다 중 하나는 ‘핵 없는 세계’였다. 2009년 4월 프라하에서 제시된 이 비전은 그 해 오바마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가능케 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후 2015년 7월 13년 만에 이란의 핵협상에서 성과를 냈고 2016년에는 히로시마를 방문해 평화공원에 헌화를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나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논란을 보면 이런 노력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었던 것 같다. 미국과 북한이 한참 ‘말폭탄’을 주고받은 뒤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보면 그렇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대화를 언급하고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미국의 대응을 지켜보겠다고 발언하면서 북미 간의 협상 가능성이 점쳐지지만, 여전히 북핵 인정이냐 전쟁이냐의 양자택일 압력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재론한 한반도 위기 해법의 내용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상황을 좀 더 분명히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재와 대화는 선후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적어도 북한이 추가적인 핵과 미사일 도발을 중단해야 대화의 여건이 갖춰질 수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은 핵 동결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사일 도발 중단 및 핵 프로그램 동결로부터 대화를 시작해 비핵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론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핵 프로그램 동결이 대화의 입구라 할지라도 북한이 비핵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라는 점이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바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수혁 의원은 지난 14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협상을 진행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사실은 별로 답이 없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이를 두고 15일 사설에서 “이들은 ‘먼저 북핵을 동결하고 나중에 폐기한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인들도 잘 알 것이다. 그저 현실을 모면하고 회피해 보자는 것뿐”이라면서 “북핵이 '동결'이란 이름으로 인정되면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은 영원히 핵 인질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16일 사설에서도 “‘전쟁 반대’와 ‘평화적 해결’은 백번 옳은 말이지만 그것으로 북핵 폐기가 안 될 경우에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김정은의 핵 노예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느냐는 것”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구상에 의문을 표했다.

조선일보의 대안은 전쟁을 각오한 대북 압박을 해야 역설적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약한 주장이지만 적어도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현실 인식은 크게 잘못됐다고 하기 어렵다. 앞서 이수혁 의원의 발언으로 보면 현재 문재인 정부의 주요 인사들도 비핵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으로 읽힌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참여정부에서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을 지낸 박선원 전 비서관이 페이스북을 통해 밝힌 주장 역시 이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박선원 전 비서관의 주장은 전술핵 재배치와 한미연합훈련 축소 및 사드 배치 철회를 맞바꾸고 중국을 대북제재의 단일전선으로 끌어들인 후 여기서 우리 정부의 입장을 관철시키자는 거다.

그런데 전술핵 재배치가 선택지 중 하나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가 북한을 압박하는 명분상의 지렛대 중 하나인 ‘한반도 비핵화’는 깨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후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 상태에서 ‘힘의 균형’을 찾는 것밖에 답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나리오에서 북미 간 ‘대화’의 결론은 북한 핵보유국 인정 또는 핵 프로그램 동결-북미평화협정-주한미군 감축 내지는 철수의 프로세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있더라도 우리 정부가 최대한 개입해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하는 게 맞지만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기 어려운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은 미국의 전문가들도 하고 있다. 오바마 정권에서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지낸 제임스 클래퍼가 대표적이다. 제임스 클래퍼는 기회가 될 때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북핵을 인정하거나 제한 또는 통제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현지시각 지난 13일 미 CNN방송 인터뷰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제임스 클래퍼 주장의 근거는 과거 북한을 방문했던 경험이다. 제임스 클래퍼는 현직이던 박근혜 정권 시절 우리 정부에 북미평화협정 논의가 이뤄질 경우 어느 선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문의한 것으로도 알려진 바 있다.

우리 정부의 입장에서 비핵화 포기의 반대급부는 자주국방이다. 북한 핵보유국 인정으로 주한미군이 규모가 감축되거나 철수할 경우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군과 해군 장성 출신을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고 미사일 사거리 및 탄두중량 확대 관련 협의, 핵잠수함 건조 등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종합해보면 현재 상황의 모든 조건들이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물론 당장 전쟁이 나는 것보다야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게 훨씬 낫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평화군축이라는 관점에서는 문제가 오히려 심각해지는 것일 수 있다. 앞에서 실질적인 평화군축 프로세스가 작동하려면 남북 간 또는 북미 간에 핵무기를 포함한 군축협상이 진행돼야 한다. 그러나 군비가 최대한으로 확대된 상태에서 이런 협상이 가능할지는 여러 측면에서 봐도 회의적이다.

오바마 정부의 ‘핵무기 없는 세상’은 사실 당시에도 현실성이 있는지에 의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적어도 핵군축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 발효 이래로 세계 각국의 거부할 수 없는 대명제로 인식돼왔고 오바마 정부의 슬로건은 이에 힘을 실어 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긍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스트롱맨’들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평화군축은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그 성격상 현안에 대한 ‘표준적’ 대응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영원불멸하지도 않으므로 동아시아를 둘러싼 군사적 위기의 수위를 낮추는 것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미래 정치를 주장하는 누군가는 평화군축의 가치에 근거한 주장을 공세적으로 내놓고 이의 실현을 위해 동아시아 내의 다른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과연 누가 지금 그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실은 이게 현 시국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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