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는다는 천지호가 죽었다. 대길을 구해 황철웅에게 복수하려다가 그만 죽음을 맞은 것이다. 예기치 않은 천지호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출연 비중이 아주 미미한 조연 하나가 죽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마치 주연급 캐릭터 중의 하나가 죽은 것 같은 충격이다. 그만큼 천지호의 하차로 인한 상실감이 크다. 천지호 캐릭터가 <추노> 속에서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죽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미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올렸었다. 그녀가 주연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첫째, 미실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했고, 둘째, 고현정의 연기가 워낙 눈부셨으며, 셋째, 남은 연기자들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악당 조연이었던 미실의 죽음이 크게 아쉬웠던 것이다.

성동일이 연기한 천지호는 <선덕여왕>에서의 미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비중이 작았다. 하지만 미실의 하차와 비슷한 이유로 아쉽다.

첫째, 미실처럼 천지호 캐릭터의 존재감도 강렬했다. 비록 양적으로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천지호는 나올 때마다 화면을 완전히 장악했다. 가히 ‘미친 존재감’이었다. 많은 시청자들이 천지호를 <추노>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였다.

둘째, 고현정처럼 성동일의 연기가 눈부셨다. 성동일은 빨간양말 이후 연기인생 최고의 기회를 <추노>에서 잡았고, 그 기회를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코믹하면서도 귀기가 흐르는 그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은 호사였다. 그 절정의 연기가 잠깐씩 나오는 캐릭터를 심리적인 주연으로 만든 것이다.

셋째, 남은 캐릭터들이 천지호 이상으로 강렬하다면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덜할 텐데, 미실의 죽음 때처럼 남은 캐릭터들이 죽은 캐릭터에 비해 강렬하지가 못하다. 특히 극의 중심이 되어야 할 주연 3인방 중에 대길을 제외한 두 캐릭터가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흡사 미실이 가고 남은 덕만, 유신, 비담 중에 둘이 여전히 약했던 상황과도 같다.

그리하여 천지호의 죽음이 아쉽고 허탈하다. 그의 살벌한 눈빛과 능글능글한 웃음, ‘나 천지호야~!’라고 소리치는 허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다. 천지호의 비굴함, 야비함, 잔인함, 구차함, 야수성, 낙천성 등은 <추노>을 역동적이게 하는 핵심적인 동력이었다.

도포 입은 양반들이 나올 때면 답답해지던 극이, 또 송태하와 언년이가 나올 때면 처지던 극이, 천지호만 나오면 꿈틀꿈틀 살아났다. 천지호야말로 노비와 민초들의 세계를 조명하는 이 작품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캐릭터였다. 제주도에서 송태하와 언년의 화보촬영 러브스토리로 극이 늘어질 때, 극의 중심을 잡은 것도 천지호 성동일이었다. 그야말로 주연같은 조연이었던 것이다.

어이없는 죽음

천지호의 죽음이 특히 더 아쉬운 것은, 너무나 어이없이 당했기 때문이다. 대길을 구하다 난전 중 흘러나온 화살에 등을 맞고 말았다. 이것이 그 악랄하고 무시무시한 ‘천지호’의 최후란 말인가?

천지호 캐릭터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그가 너무 우습게 죽었다. 작품이 천지호라는 캐릭터에게 지금까지 축적한 에너지가 있다. 시청자들이 기대치를 갖게 유도하기도 했다. ‘천지호가 뭔가 사고를 치거나, 악착같이 황철웅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여 주겠구나‘라는 기대를 갖게 한 것이다.

그런 에너지, 기대들을 모두 한 방에 날려버리고, 천지호를 ‘앗’ 하는 사이에 허무하게 죽여버렸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일 거면 제주도에서 동생을 묻으며 ‘나 천지호야!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는 천지호야!’라고 귀기어린 표정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을 왜 부각시켰단 말인가.

그 복수의 다짐에 값하려면 천지호는 더욱 악착같이 날뛰었어야 했다. 이건 마치 어떤 연극 1장에서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관객에게 기대감을 갖게 한 배역이, 2장에서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것처럼 허무하지 않은가. 그럴 때 관객은 야유를 던질 것이다.

천지호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악귀처럼 황철웅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기대했던 시청자로서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추노>가 천지호를 능욕한 셈이다. 천지호 캐릭터를 너무나 어이없이 내다버렸다. 마치 휴지조각 버리듯이.

천지호와 대길의 공동전선이 무산된 것도 아쉽다. 대길을 천지호가 구해내고, 둘의 공적이 황철웅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대길과 천지호가 함께 칼을 드는 구도가 가능했었다. 제주도에서 천지호가 극의 중심이었다면, 최근엔 삶은 계란 오열의 대길이 극의 중심이었다. 두 중심이 만났을 때 얼마나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올 것인가! 그런데 둘이 만나자마자 천지호를 정리해버리다니. 이건 아니다.

복수도 못하고 어이없이 객사한 천지호의 명복을 빈다. 아무튼, 일개 조연의 명복을 빌게 만든 성동일은 위대했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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