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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아니라 세상과 싸우자약자 밟고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시도는 실패 반복할 뿐
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7.08.07 08:24

여성주의에 대해 글을 쓸 때에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생물학적 남성인 스스로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남성이 여성혐오 문제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나 역시 여성혐오의 일상으로 둘러싸인 삶을 살고 있다. 과연 여성주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의도’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많은 요즘이다 보니 말을 꺼내기가 더 쉽지 않다. 한쪽에선 그저 여성들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으로 ‘선비질’이나 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냐고 한다. 또 반대쪽에서는 여성주의 이슈가 호응을 얻고 있는 시대이니 이에 ‘숟가락’을 얹어 ‘한철장사’를 해보자는 것 아니냐고도 한다. ‘의도’를 의심하는 주장에는 거의 반론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글을 적는 것은,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바뀌고자 하는 목소리를 남성 스스로가 내는 사례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게 쓰지 않는 것 보다는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뿐이다.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및 왁싱샵 살인사건 규탄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6일 여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여성혐오 범죄를 멈춰라’와 ‘여성혐오 살인을 공론화하라’는 것이다. 한 달 전 쯤 강남의 한 미용업소에서 여성 왁싱사가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려는 목적이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되는 것은 범인이 혼자 일하는 여성을 노려 범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혼자 일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무제한적인 불안감을 안기기 충분하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혐오 범죄를 멈추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공론화’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사건의 성격을 둘러싼 담론의 현실을 상기하게 하는 슬로건이다. 유사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여성혐오 범죄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이 논란은 합리적 담론 영역에서 사건을 여성혐오(misogyny)에 의한 어떤 범죄로 규정할 것인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hate crime)로 규정할 것인지의 틀 안에서 논의될 수 있다(당연히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결과에 따라 향후의 대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논의는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사법부의 재량 영역에서부터 형량의 형평성을 제고하는 것에서부터 별도의 입법을 추진하는 것까지 다양한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성혐오 살인을 공론화하라’는 요구는 이런 합리적 수준의 논의를 겨냥한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이 요구는 남성들이 사건의 성격을 불분명하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일부 남성들은 여성혐오 범죄에 관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말라”거나 “단지 범죄 대상으로 삼기에 적절했기 때문이지 여성이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게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을 내놓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여성이 남성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의 사례를 열거하며 “왜 여성의 범죄에는 침묵하느냐”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내로남불’이며 ‘이중잣대’라는 것이다. ‘내로남불’과 ‘이중잣대’는 현대의 인터넷 세상에선 극형을 피해갈 수 없는 대역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1차원적으로 따져보더라도 논점이탈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한 형태의 범죄에 대한 체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이 모든 범죄에 대한 입장을 의무적으로 표명할 이유는 전혀 없고, ‘성별권력의 격차로 인한 범죄’와 ‘여성이 저지른 범죄’는 당연히 사회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왜 이런 논리적 무리수를 감행하면서 ‘가해자’의 지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그들의 세계 속에서 그들 역시도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성혐오 범죄에 있어서 남성의 책임을 경감하자거나 그들의 아픔 역시도 이해하고 포용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남성들이 갖는 왜곡된 인식의 근원을 스스로가 인식할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태도 변화를 촉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피해자 서사’는 이런 식이다. 자신들도 일생을 열심히 노력했으나 경쟁에서 낙오되고 있다. 어차피 승자가 될 확률이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갈 정도에 불과한 ‘헬조선’의 경쟁에서 낙오된 이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특정 지역 출신 등을 ‘약자’로 지목하고 그들에게 ‘특혜’를 부여하고 있다. 이에 밀려 낙오당하는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어 “잠재적 범죄자”라고까지 한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인터넷을 통해 습득한 논리를 동원해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

최근 불거진 교원수급정책 실패에 대한 인터넷 상의 일부 비판도 이런 논리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는 여성이 교대생이 되는 것부터가 불평등의 시작이다. 이런 인식의 맥락에서 초등학교 교사는 세상에 다시없는 편한 직장일 뿐이며 그저 ‘좋은 신붓감’일 뿐이다. 이들은 강자인 남성과 혼인을 한 대가로 육아휴직을 쓰고 아침부터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일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 “임용 인원 감축이 불만이면 지방으로 가면 될 것 아니냐”는 반론에 “솔직히 죽어도 시골은 싫다”는 반응이 나오자 이런 인식을 기본으로 한 혐오성 주장을 내놓는 이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사회 구조의 차원에서 성별에 의한 권력격차가 발생시키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이런 식의 ‘피해자 서사’에 일말의 진실이 있더라도 싸워야 할 대상은 ‘헬조선’의 체제 그 자체이지 불행한 현실에 항의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아니다. 스스로의 불행을 ‘약자’의 책임으로 돌리며 모든 이들이 부당한 체제 질서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겁한 일이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남성들의 이런 정서가 거의 모든 문화적 영역에서 일종의 ‘성적 착취’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의 서브컬처물, 영화 및 방송, 아이돌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여성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상기해보라. 성적으로 도구화하는 코드를 동원하지 않으면 ‘여성’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그려졌던 여성은 이제 전리품인 동시에 갈등의 최전선에서 스스로 직접 싸워야 하는 존재로 표현된다.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식민지를 착취해 다른 열강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했던 시도의 재현이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 (소녀전선 페이스북)

즉,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남성은 강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약자를 착취하는 ‘총력전’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구조가 이들이 스스로 구조적 가해자임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나’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정한 가해자’는 ‘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들이 ‘일부 남성’을 들먹이는 이유이다. 이들은 끝없이 ‘비정상’을 ‘정상’인 자신에게서 분리함으로써 스스로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또 재확인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전히 ‘헬조선’ 체제가 강요하는 경쟁에서 낙오되는 스스로의 불행에 다시 한 번 직면하는 것일 뿐이다.

이 난장판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남성 스스로의 각성과 결단이 필요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여성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불행의 원인을 약자에게서 찾지 말고 체제에 함께 맞서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약자를 밟고 강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나’를 포함한 ‘피지배자들의 수평적 연대’를 모색해보라는 뜻이다. 이는 남성 스스로가 가진 구조적 기득권을 인식할 때에야 가능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이에 동의하는 더 많은 남성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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