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대북정책에 대한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일각에서 제기된 극단적 해법에 대한 우려는 진정되는 모양새다. 틸러슨 국무장관은 현지시간 1일 워싱턴DC의 국무부 청사에서 진행된 브리핑에서 북한의 정권교체 및 붕괴, 군사작전에 의한 한반도 무력통일 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어느 시점에 북한과 대화를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주한미군 철수를 고리로 중국과의 북한 정권교체에 합의할 것을 주장하고 제이 레프코위츠 전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한반도 영구분단에 기초한 대북정책을 언급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됐지만, 틸러슨 국무장관이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진정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 브리핑 덕에 2일자 국내 주요 일간지들의 경고성 기사 및 사설들은 다소 힘이 빠지는 모양새가 됐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 (연합뉴스/EPA)

틸러슨 국무장관의 브리핑은 세 가지 요인을 고려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헨리 키신저 전 장관 등이 주장하는 북한 정권교체 및 붕괴론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이뤄진다 하더라도 혼란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레짐 체인지’는 최근까지 미국의 대중동정책에서 종종 보여져왔다. 사회주의 성향(nasserism, baathism)을 자처하는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강제로 민주적 정권을 들어서게 한 결과는 크게 군벌들이 서로 충돌하는 내전 국면으로 가거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거나의 두 가지 결과로 이어졌다.

북한의 경우는 어떨까? 김정은 정권이 붕괴한 이후 상황을 통제할 정권이 수립되지 않는다면 군부 내 파벌 간 대립으로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이 여파로 북쪽과 남쪽 국경에 많은 수의 난민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큰데, 중국과 우리 정부가 이런 상황을 반길 리는 없다. 미국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유엔과 주변국들이 북한을 분할통치 하는데 합의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도 있다.

북한이 현재 놓여있는 사정에서 내전을 초래하지 않을 ‘대안적 정권’의 성격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정통성’이다. 북한 정치권력의 정통성은 “백두혈통”으로 대표되는 기이한 개념으로 뒷받침된다. 둘째는 정권이 붕괴하는 시점에 대안세력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느냐다.

예를 들어 현재 시점에서 2인자로 불리는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이나 최룡해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이런 조건과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대안적 정권’의 조건을 만족하는데 가장 근접했던 인물은 중국이 선호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남-장성택 조합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에 의해 선제적으로 제거됐다. ‘레짐체인지’를 위한 조건은 연일 험난해지고 있는 것이다.

틸러슨 국무장관의 입장 발표를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요인은 그간 혼돈에 빠졌던 백악관이 어느 정도 질서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라인스 프리버스 비서실장을 밀어내고 공보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전임자들에 대한 온갖 막말과 함께 백악관에 화려하게 등장한 앤서니 스카라무치는 열흘 만인 지난 31일 경질됐다. 경질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오가지만 결과적으로 존 켈리 신임 백악관 비서실장의 권한이 확인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존 켈리 신임 백악관 비서실장 (연합뉴스/AP)

존 켈리 비서실장은 해병대 출신으로 ‘규율’을 중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카라무치 경질을 용인하였다는 것은 재러드 쿠슈너와 이방카 트럼프 등 대통령의 가족들, 스티브 배넌 등 ‘대안우파’들, 공화당 주류 출신들 등으로 나눠진 백악관 내부의 암투로 결정적 문제인 러시아 스캔들과 오마바케어 폐지 등의 문제가 통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이다. 유사한 원리로 허버트 맥마스터 NSC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군 출신들의 상황통제력이 확장될 것이라는 점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 내 정치라는 관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빠른 속도로 안정화될 것이다. 실제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각료를 신뢰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간 스스로 트위터를 활용해 대놓고 비난해 온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 역시 포함된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과 함께 트럼프 내각을 떠날 가능성이 큰 인물 중 하나로 꼽혀왔다. 이날 브리핑에 나선 것 역시 사퇴설을 일축하고 그간 자신이 밝혀온 정책적 견해가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것이다.

틸러슨 국무장관의 발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세 번째 대목은 미국의 주요기관들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을 평가한 결과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보도를 종합해보면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의 탄두는 대기권 재진입 과정에서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소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 북한 군사당국이 애초 설정한 탄착점에서 벗어난 정황도 감지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북한이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미국 본토에 떨어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상당 기간이 소요될 수 있다. 북한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노선을 유지하는 것은 ‘상수’지만 적어도 그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은 확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도 ‘비상한 해법’보다는 원래의 단계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게 합리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오전 1시 북한이 28일 밤 자강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기습 발사한 것과 관련해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소집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청와대)

그렇다면 틸러슨 국무장관의 브리핑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대북정책의 ‘운전대’에 앉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위기가 닥치는 상황은 피할 수 있겠지만 우리 정부가 처한 어려움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를 통제하는데 앞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군 출신 인사들은 근본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물론 이들의 성향보다 우선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심중이다).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중압박을 더 강하게 제기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특성상 이 압박에는 반드시 무역불균형 문제가 포함되게 돼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마라라고 회동을 할 당시 미국의 중국 환율조작국 지정과 중국의 대북압박이 연동됐었다는 걸 떠올려 보라. 동아시아의 외교안보 문제는 미국과 중국이 대표하는, ‘미국 일본 한국 대 중국 러시아 북한’의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운전대에 앉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 개입력을 확보해야 하고, 북한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북한이 오직 미중관계가 동아시아 정세를 좌우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선 우리 정부가 어떤 ‘당근’을 내밀어도 당분간 대화의 테이블에 앉지 않을 것이다. 우리 정부가 미중과 어떻게든 외교안보적 협상 국면을 만들기 위해선 한미FTA와 사드 문제 등에서 양보 또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드 배치라는 카드는 그게 무엇 때문이든지 간에 이미 소모해버렸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이 험한 정글을 그래도 헤쳐 나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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