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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짜 문제는적폐청산, 원칙과 가치 논하는 공론장 조성으로 이어져야
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7.07.28 09:41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가 나왔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징역 3년을 받았고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은 국회 청문회에 나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모른다고 한 위증에 대해서만 유죄 선고를 받았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헌법 위배라는 점을 확인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던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사실상 무죄 판단을 받은 것에 대해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재판부 판단의 핵심은 이 사안의 총체적 책임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 판단에 따르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집행을 지시했고 승인했으며 때로는 이와 관련한 계획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판단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상당 부분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이념적 소신’, 또는 ‘과잉충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런 취지로 재판부는 “다른 국정농단과는 성격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해 이후의 논쟁을 예고했다.

그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일종의 ‘정책적 자율성’을 발휘한 것으로 포장했다. 역대 정권 모두가 자신들에 우호적이거나 비판적인 단체에 대한 지원 확대 또는 축소 등의 정책을 펼쳐왔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한 일은 ‘비정상의 정상화’의 일환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재판부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조금을 어떻게 지급할 것인가는 물론 정부의 권한이다. 재판부는 “좌편향 정책을 수정한다는 의도였다고 해도 이는 적법한 절차에서 투명하게 실시돼야 한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를 통한 보조금 배제 정책은 은밀하고 위법한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블랙리스트 작성 기준을 정권에 대한 충성도로 놓고 본 것에 대해서도 “합리성을 찾을 수 없는 기준”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인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성·관리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7일 오후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선고 공판을 마친 뒤 호송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이러한 기만적 현실인식이 과거 보수정권들의 ‘공통분모’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말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언급한 조어지만 그 실상은 이명박 정부의 ‘좌파 적출’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언급한 바로 그 논리로 문화계의 좌파 인사들을 솎아내기 위한 일련의 정책적 행보를 강행했다. 이러한 정책의 행동대원격을 자임한 유인촌 당시 문체부 장관은 “이전 정권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등의 노골적 발언을 주저 없이 했다. 황지우 총장이 정권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사퇴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가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때다.

돌이켜보면 보수 정권은 언제나 체제의 이념적 위기감을 부풀리며 자신들의 위헌적 행위를 정당화해왔다.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북한의 존재를 들어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하며 민주주의를 유예한 역사부터가 그렇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월남 패망의 교훈’을 공식 석상에서 종종 언급한 것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체제의 위협을 키우던 자들이 전쟁 이후 공산주의자였던 걸로 드러났다는 데에서 교훈을 얻자는 얘긴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논란이 된 공영방송 장악 문제 역시 친북좌파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어 일종의 극약처방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배후에 깔려 있었다고 봐야 한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이런 점을 상기할 때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박근혜 정권의 문제 뿐 만이 아니라 언론장악을 포함한 이명박 정권이 만든 문제까지 해결할 지혜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 과정에는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보수언론은 이미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8일자 사설에서 “예술보다 이념을 앞세우고 예술을 정치적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 여기는 활동에 무작정 국민 세금을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좌파 예술인과 단체에 대한 지원이 급증한 것과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이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문제를 정파의 이해득실로 만들어 “너희가 하니까 우리도 한다”, “똥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하는 전형적인 프레임 전략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결국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비판적 입장인 문재인 정부 사람들은 ‘내로남불’, ‘이중잣대’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애초에 정부가 문화예술인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것에 대한 취지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정부가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정책을 펴는 이유는 그들이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정권의 이해득실보다 높은 차원의 문제이다.

따라서 문화예술정책 방향의 기준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예술 활동인가’가 아닌 ‘어떤 예술인가’에 맞춰져야 하고, 이 기준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문화예술인 스스로의 자기 평가와 전문성을 갖춘 이들의 견해에 더해 시민사회의 여론이 무엇보다도 우선돼야 한다. 따라서 조선일보가 “공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해답이 아니다. ‘공정한 예술 활동’을 누가 평가할 것인가부터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이명박 전 대통령 사무실에서 이 전 대통령을 만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즉,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이해득실’의 논리에 맞서서 애초에 제기된 ‘원칙’의 힘을 되살리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밖에 없다. ‘적폐청산’을 내거는 이 정부가 다소 어렵더라도 이 길을 가야만 한다. 혹여 상대를 척결해야 할 ‘악’으로 규정하는 데만 몰두하면 개혁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새 정부의 ‘적폐청산’은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논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고 이를 가능케 하는 공론장의 조성을 추구해야 한다.

과거의 기득권들은 끊임없이 ‘정치보복’을 언급하며 ‘내로남불’, ‘이중잣대’로 상황을 규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의 폐단을 바로잡자는 여론을 짐짓 모른 척 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이제 분위기가 심상찮으니 펄쩍 뛰는 것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잘 보여준다. 어설픈 ‘절충’이 돼서도 안 되지만 ‘빌미’를 주어서도 안 된다. 새 정부는 이전의 기만적 정권과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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