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대선이 앞으로 16일 남았다. '당신의 선택이 대한민국을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은 우리 국민의 소중한 한표 행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지만 현재의 선거 판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최근 언론사 여론조사를 보면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한 부동층이 17%~37% 사이를 오가고 있다. 투표일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정책과 자질을 더 꼼꼼히 비교해서 지지 후보를 정하겠다는 행복한 고민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번 대선엔 도대체 찍을 사람이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에 동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벽보 선전물을 통해 활짝 웃고 있는 12명의 후보. 역대 대선 사상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그러나 12월 19일 마지막까지 최종적으로 남게 될 후보가 몇 명인지는 아직 모른다. 심대평 후보를 내세운 국민중심당은 주말 내내 논쟁을 벌이더니 3일 오전 이회창 후보로의 단일화를 전격 선언했다.

정동영 후보와 단일화를 모색했던 이인제 후보는 독자 노선을 걷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정동영 후보와 문국현 후보의 단일화 여부가 관건이다. 두 사람이 단일화를 한다면 대선 판도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을까? 어쨌든 대선 후보는 또 한명 줄어들 것이다.

후보 단일화는 우리 정치판에서 어느덧 대세를 넘어 유행이 된 것처럼 보인다. '대선 승리를 위해' '정권교체를 위해' '수구보수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저마다 명분도 다양하다. 일단 한표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짝을 짓고 손을 잡으려 든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들의 변덕과 정치적 계산을 지켜보는 유권자들도 덩달아 정신이 없다.

만약 지지하던 후보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정책이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자질이 다른 후보들인데 정권교체 또는 정권연장을 위해 뭉치고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권자는 안중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뜻을 공유하는 세력이 결집해 국민들이 선택할 기회를 드려야 한다"며 범여권 단일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한 정치인의 발언은 어떤 면에선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 하는 철학과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도달하면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범'이 이렇게 큰 위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해 '모두 아우르고' 또 '살아야겠다'는 것인지, 자신의 행동과 정책 그리고 철학이 국민에게 얼마나 믿음을 주고 있는지부터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BBK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도 어떤 결론을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과연 검찰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지, 그리고 언론의 전망대로 대선 후보들의 운명을 가르게 될 것인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2주 남짓 남은 대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는 생물과 같다고 했던가. 아무리 정책 선거의 중요성을 외치고 천박한 정치풍토를 바꿔야 한다고 외쳐도 그들이 차려내는 잔치상엔 정책과 공약보다는 거짓말과 말바꾸기, 네거티브 전략과 이합집산이 가득해 수저를 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잔치상 아래에 숨겨둔 복잡한 정치 셈법이 언제 이 상을 뒤엎을지 불안하다. 그들이 호소했던 진정성이 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질수록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두운 터널 속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스산한 겨울, 대선 후보 벽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2월 19일까지 정말 찍고 싶은 지지 후보를 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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