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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소름돋는 장혁의 연기와 이다해의 민폐 탈출[탁발의 티비 읽기] 절망에 임하는 사내의 자세
탁발 | 승인 2010.02.18 10:32

   
 

10년을 오매불망 찾아 헤맸던 대길의 집념을 생각한다면 오장육부에서 끌어 오르는 절규는 충분히 가슴에 와닿는다. 잘 돼가는 사랑의 감정은 가슴에서 오락가락 하지만 절망으로 닫아야 할 경우 사랑은 내장에서 요동친다. 적어도 사내는 그렇다. 원손을 아마도 언년의 아이로 착각한 대길은 복수는 커녕 자신을 황급히 숨기고 만다. 그리고 실연을 넘어선 지독한 절망과 열망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소름 돋을 정도로 훌륭한 연기였다.

아이리스를 초반에 보다 포기한 탓에 칭찬 자자한 이병헌의 연기와 비교할 수 없지만 아마도 누굴 시켜도 장혁만큼 그 절절한 고통을 잘 표현해내기는 힘들 것 같다. 남자가 보면서도 아니 남자이기 때문에 더욱 장혁의 처절한 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을 그런 혼신을 다한 연기였다. 사랑하기에 보내준다는 순애보의 원칙을 충실히 준수하면서도 속에서 끌어 오르는 회한과 미련 그러나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는 대길의 지극히 당연한 모습을 다 보여주었다.

   
  ▲ 언년과 태하가 첫날밤을 보낼 때 조용히 찾아든 대길이 창호에 비친 언년의 얼굴께를 어루만지는 모습은 백 마디 말보다도 절절한 묘사였다.  
 

문득 황동규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추노 13회를 지배한 대길의 연기를 표현하기에는 장문의 분석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시가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도>라는 시에,

인적이 드문, 모든 것이 서로 소리치는 거리를 지나며 나는 단념한 여인처럼 눈보라처럼 웃고 있었다. (중략)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 주며는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라고 사랑의 자세를 말한 것이 떠오른다. 10년 동안 잠시도 마리 속에서 떠난 적 없는 두 남녀가 운명(추노를 제대로 봤다면 이 운명은 시대의 모순)의 잔인한 이간질로 모른 채 살아왔다. 대길은 그저 멀찍이서 본 언년의 모습만으로 알아서 포기하고, 제 풀에 절망하는 모습이 참 못난 사랑의 시처럼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시보다 더 시 같은 연기였다.

그런 대길이기에 추노질을 그만두자는 말을 꺼낸다. 반발하는 왕손이와 달리 최장군은 대길의 심중을 알아채고 조용히 돌아가자고 한다. 절망의 끝에 선 대길에게 그나마 최장군같은 동무가 있어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때쯤 송태하를 찾아내기 위한 황철웅의 집착은 반대파의 목숨을 수두룩한 피 묻은 호패로 바꾸고 있다. 그런 황철웅 뒤를 아우들을 모두 잃은 천지호가 쫓고 있다. 은혜는 안 갚아도 원수는 갚는 왈패의 기본기 잘 갖춘 천지호는 철웅의 아내를 먼저 찾는다.

   
 

추노를 이야기를 적지 않게 해오면서도 사실 그동안 철웅의 아내에 대한 언급을 일부러 피해왔다. 단지 연기일 뿐이고, 남들이 제2의 문소리니 하는 칭찬하는 것에도 수긍하지만 어쩐지 그녀에 대해 쉬이 말하기가 저어됐다. 장애 여성의 몸은 관심 정도로 접근하기에는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추노에서 철웅 아내(하시은)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글이 있다. 하시은의 연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한번 읽어볼만한 글이다. (감추어야-하는-몸과-드러내도-좋은-몸)

깊은 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느 규방 아낙처럼 바느질을 할 수도 없는 철웅의 처는 천지호에게 죽여 달라고 한다. 이미 가슴 너덜거릴 정도로 대길의 절망을 보고 왔지만 그 말을 하면서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에 또 한 번 세차게 가슴을 두들겨 맞아야 했다. 차마 이해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비장애인은 그저 인지하는 정도일 그녀의 차라리 죽음이 절실한 그 한 마디 "나를 죽여주시오"는 13회의 키워드 같다.

그러나 천지호는 천하에 몹쓸 왈짜답게 모욕적으로 거절한다. 장애 아내를 죽여주면 그것이 오히려 황철웅에게 득이 된다는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리얼리티를 위해서는 천지호의 그 말이 딱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장애 여성에 대한 너무 지독한 리얼리티였다. 다른 말로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를 좀 더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드라마 효과를 위한 감독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욕심을 조금 덜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민폐(?) 언년은 또 다시 불씨를 남기고 말았다. 혼례를 치른 뒤 태하가 원손을 부탁하며 '아들 같은 분"이라고는 했지만 "엄마가 되겠다'는 언년의 대답은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말이다. 물론 그만큼 진심을 다해 보살피겠다는 말이지만 워낙 언년에 대해서 차가운 시선을 감안한다면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원손의 사면이건 권좌를 바꾸는 반정이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왕자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은유라도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아니 그 전에 충신 송태하가 마음이 그렇다 해도 원손을 향해 아들 운운한 것부터가 본분을 망각한 발언이었다.

그렇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13회가 끝날 즈음에 참으로 오래 기다렸던 이다해의 눈물 연기가 터졌다. 원손의 찬거리를 사러 장에 나온 그녀의 눈에 대길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운은 별로 없었다. 이미 장혁과 하시은의 연기를 본 후라서 그 충격의 파장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것만도 참 다행이다. 이다해의 남 못지않은 연기를 이제부터라도 발휘해서 그간의 오명을 스스로 벗겨내는 계기를 기대하게 한다. 작가가 극 후반에 가서는 언년의 대단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 말했듯이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같은 무지렁이 인생들이야 칼날 위에서 춤추는 것" 마의가 훈련원 말을 팔아먹은 죄로 관노로 떨어져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방화백이 주모들에게 하는 말이다. 간혹 이들의 모습이 왜 삽입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일종의 괘종시계 같은 역할을 한다. 굳이 시계를 보겠다는 의식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시간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들은 추노의 주제의식이 담긴 말을 간접적으로 전달해준다.

병자호란 뒤에 어수선한 시대의 혼란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곽정환 감독이 피력한데로 "'사회구조, 계급적 모순 그리고 정치현실 등이 어떻게 개인을 스스로를 좌절시키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에 대한 중요한 이정표이기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중요한 맥락을 끌고 간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탁발  treeinu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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